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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5일 성 베다 사제 학자♬6.Alleluia,Beatus Vir Qui Suff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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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26 ㅣ No.1181

 

축일: 5월 25일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

Saint Bede the Venerable - Benedictine

영국. 베네딕또회. 672 ? -735년

 

잉글랜드 웨어마우스 쟈로우의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이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베네딕또 비스콥 원장과 체오프리드의 지도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가 성장한 뒤에는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30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평생을 그곳에서 자신이 표현한대로 "신성을 찬양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냈다.주로 성서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에 몸을 바쳤다. 교부들의 전승을 따르고 성서를 주석하는 신학 및 역사학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당대에서 가장 희박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영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주의자이며 역사학자, 시인이었던 그는 또한 훌륭한 신학자였다. 간단한 설교로써 성서를 쉽고도 감동적으로 깨닫게 하였다. 성서에 관한 그의 저서들은 당대에서 가장 권위 있었고 중요시 되었으나, 그의 역사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영국 교회사와 국민사는 널리 알려져 있는 역사서이다. 또한 그는 영문법과 연대사 작업을 하였고, 찬미가와 시를 썼다. 이외에도 그의 서한집과 강론집 그리고 순교록을 저술했는데, 이들 책들이 모두 라틴어이나, 그는 영어로 집필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그분의 시 중에서는 동정녀 성 마리아를 찬양하는 매우 아름다운 시가 몇 편 있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성 요한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세빌레의 성 이시도로의 저서들을 추출하였다.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복자(Venerable)라는 칭호가 주어진 것인데, 이 칭호는 853년, 아아헨 공의회에서 공식화 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다. 영국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오는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복자 베다"라 하였다.

그는 단떼의 천국 편에 나오는 유일한 영국인이다.

 

베다는 살아 있을 때부터 공경을 받기 시작한 몇 안되는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신앙과 학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공의회는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도 교회 안에서 그 책들을 공적으로 읽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베다는 어린 나이에 자로우의 성베네딕토 수도원 원장의 보호에맡겨졌다. 학덕과 성덕을 겸비한 수도자들의 가르침을 받게 된것은 이 천재에게는 행운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성인이 되고 뛰어난 학자, 어쩌면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당시의 모든 학문 즉 자연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원리,천문학,산수,문법,교회사,성인들의 생애, 그리고 특별히 성서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19세에 부제품을 받음-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배우고 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필사(筆寫)한 수 많은 책 외에도 자신이 직접 45권이나 되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30권은 성서 주석에 대한 것이다.

 

왕과 다른 귀족들, 심지어는 교황 세르지오 1세까지도 열심히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수도원에 계속 머물러 있고자 했다.

단 한 번 그는 요크의 대주교가 운영하는 학교에 가르치러 가기 위해 몇 달 동안 수도원을 떠난 적이 있었다.

 

베다는 그가 좋아하는 기도인 영광송을 바치면서 7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의 ’교회사’는 저술 역사의 기술과 학문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황금시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벗어난 북쪽의 야만족들에게 적응할 준비를 하던 목적을 달성했다.이러한 적응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베다는 교회 생활에 있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베다의 ’교회사’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지만 다른 모든 학문, 특히 성서에 관한 그의 저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사순절에 그는 성요한의 복음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고 죽는 날까지 그것을 보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나누어 주는"이 저서는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베다의 그리스도교인다운 생활과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모든 발견들은 그 정도인 것처럼 보인다."(’교회사’의 편집인 C.플뤼머)

 

 

 

 

 

성 베다의 임종에 대한 커버스트의 편지에서

(Nn. 4-6 PL 90, 64-66)

 

나는 그리스도를 보고 싶습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 전 화요일이 되었을 때 베다 형제의 병세는 악화되어 숨결이 매우 거칠었고 발은 약간 부어 올랐다. 그러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온종일 우리에게 학습을 지도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저술하려는 것을 받아쓰게 하였다.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습 과제를 지금 속히 배우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있을지는, 잠시 후 나를 지으신 분께서 데리고 가실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수면도 취하지 않고 감사 드리면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수요일 아침이 밝아 오자 우리가 이미 시작했던 것을 지체하지 말고 끝마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아홉시까지 그일을 했다. 아홉시자 되자 그날 늘 하던 대로 유해 행렬을 했다.. 우리 중 하나가 그의 곁에 남아 있었는데, 그는 베다 형제께" 스승님, 스승께서 받아쓰게 하신 그 책은 아직도 한 장이 더 남아 있습니다. 저희 질문에 계속 대답하시는 것은 무리가 되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펜을 뾰족하게 깍고 나서 빨리 쓰시오." 그 형제는 성인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오후 세시가 되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옷장속에는 몇가지 선물, 후추가루, 수건 그리고 향이 있습니다. 빨리 달려가서 우리 수도원의 사제들을 모시고 오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 분들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사제들이 왔을 때 모두 모아 놓고 말씀하면서 각개인에게 자기를 위하여 미사와 기도를 바쳐 달라고 권고하며 간청했다. 그들은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들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얼마 더 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고 말했을 때 형제들은 모두 큰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다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두 기뻐했다.

 

"나를 지으신 분의 마음에 드신다면,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존재하기 전 무로부터 나를 지어내신 분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나는 오래 살아왔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 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몸이 해체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영광 속에 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감화를 주는 다른 여러 가지 말씀을 하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이날을 기쁘게 보냈다. 내가 이미 말했던 윌버트라는 젊은 형제가 다시 "스승님,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 그 문장을 빨리 쓰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젊은 형제가 "이제 다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스승은 " 그 말이 맞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 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하여 "성신께"를 외울 때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항상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토록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리워하던 천국의 기쁨으로 틀림없이 옮겨 갔다고 우리는 믿는다.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며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다니 12,3).

 

이 구약의 예언은 성 베다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로서 4세기부터 5세에 결쳐 게르만 민족이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 침입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뿌리 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보호해 뒷날 서양 문명의 귀중한 모태가 되도록 한 것은 주로 그의 공로 덕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신학과 기타 일반 학문의 방면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

 

그가 성인이라는 평판은 이미 그 수도원에서부터 영국 전토에 퍼져 주교, 국왕과 같은 권력자도 그와 교제하며 그의 예지와 덕행의 빛이 충만한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더욱이 그의 말이 일층 더 권위를 지니게 한 것은 그의 성스러운 생활인데, 일반 사제, 수도자들도 그의 고결한 모범을 우러러보고서는 엄숙히 정장을 하고, 스스로 반성해 개과천선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인이 무엇보다 힘을 쓴 것은 성서 지식의 보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보급을 위해 거의 모든 성서의 주해서를 저술했다. 또한 여력을 기울여 물리, 천문, 식물 등의 방면에서도 박학한 지식을 쌓아 많은 저서를 발간했고, 동양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었다. 이상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베다는 직접 선교 사업으로 진리를 수많은 나라에 전한 성 보니파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와는 달리 주로 문필로써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끊임없는 노고 때문이었는지 위의 질병과 호흡 곤란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담당하고 있던 신학생에게 하는 강의를 중단하지 않고 공동 기도에도 출석할 뿐 아니라 한밤중에도 다윗의 시편을 외우며 주님께 기도드린 때가 많았다고 한다.

병약의 몸인 그가 주님께 불리어 천국으로 떠난 것은 735년 5월 26일 마침 주님 승천 축일이었다.

 

 

 

 

 

 

 

♬6.Alleluia,Beatus Vir Qui Suffert-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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