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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7.Os Lu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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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26 ㅣ No.1182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TIEPOLO, Giovanni Battista

1740. Oil on canvas, 360 x 182 cm Museo Diocesano, Camerino

 

 

 

축일;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St. Philippus Neri, C

St. Philip Neri

증거자, 창설자, 이탈리아

1515-1595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 4).

필립보 네리는 이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일생의 표어로 삼은 성인이었다.

필립보 보노(선량한 필립보)라 하면 당시의 로마 시민으로서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1515년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가난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필립보 네리는 산 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회에서 교육받고 부유한 상인인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부는 18세가 된 필립보를 자기의 가업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상당히 많은 유산을 남겨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필립보는 그러한 재물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청빈한 생활을 동경하여 일체를 포기하고, 16년이란 오랜 세월을 친절한 친구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의 두 자녀의 교육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며, 사삐엔짜와 산따 아고스띠노에서 철학과 신학을 3년 동안 공부하였다.또한 틈만 있으면 시내의 성당, 카타콤바 등을 순례하고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특히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나 무수한 순교자의 성혈로 물든 원형극장에는 12년동안 거의 날마다, 때로는 밤중에도 참배하며 자신도 그러한 순교자와 같이 신앙이 견고해지기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1544년의 성령 강림 대축일 전날, 필립보가 해오던 대로 카타콤바에 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특별한 은헤를 받게 되었다. 즉, 한없는 성스러운 사랑이 충만되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갈빗대 두 대가 부러지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는 일평생 낫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교회 내에는 불행히도 냉담적인 폐풍이 충만해 있었다. 필립보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이 같은 신자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려고 힘쓰는 동시에 병자나, 빈궁자나, 먼 곳에서 온 순례자의 구제 등 육신의 자선 사업에도 노력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영적 사선사업을 중요시하여 죄인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도록 주선해 주었다.

 

필립보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인품과 쾌활한 성격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했다. 그 중에도 마을내의 아이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르며 같이 놀기도 하고, 교리를 배우기도 하고, 또한 성당에 참배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필립보에게 "이처럼 아이들이 떠들어서야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아니오, 죄만 짓지 않는다면 나의 등 위에서 장작을 패도 괜찮습니다"했다고 한다. 이로써 얼마나 그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필립보는 세상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아직까지 성직자는 아니었다. 1548년, 필립보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싸 신부와 함께 "성삼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순례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40시간"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의 고해 신부는 이같이 덕이 많고 독실한 사람을 평신도로 두는 것이 아깝다 생각하고 신품 성사 받기를 권유했으므로, 필립보는 결심하고 1551년에 서품되어 사제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사제로 서품받자마자, 고해신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 지롤라모 델라 까리따로 몰려왔다. 이곳은 그가 생활하고 있던 사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마음, 겸손한 태도, 쾌활한 성격, 검소한 생활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여기에 더하여 또 착한 목자이신 예수를 본받아 방황하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이 첨가되어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해를 들으면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며 자신의 수고를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낙천적이고 명랑, 활발한 성격으로 ’피포 부우노’ 즉 ’착한 피포’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사제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면서 그 자신이 주변 젊은이들을 모아 종교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이 단체는 정규 성직자 단체의 규칙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가를 부르며 구체적이고 활발한 자선사업을 전개해 수많은 젊은이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다. 그들이 신자들을 그들의 오라토리오(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백성사를 주곤 하였으므로 "오라토리언"이란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오라토리오회"가 창설된 연대는 1564년이다. 소년과 남자들을 위한 신심 단체인 오라토리오회(Oratorians)가 창설된 것이다.거기에서 하는 일은 영적 독서, 노래, 자선 사업들이었다.

 

그는 또한 축일에는 신자들을 인솔하고 로마의 옛 성당을 참배했다. 특히 사순시기 직전의 사흘간 거행되는 세속적인 행사 사육제에는 자진해 순례의 행렬을 개최하고 이로써 세인의 죄를 보속했다.음악의 한 형식인 오라토리오가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이다.이때 필립보는 산 죠바니 성당의 주임이었고, 다섯 명의 제자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이 새로운 수도회는 1575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는 그가 로마의 명사로 꼽히고 있었다.

 

성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에게 발리셀라의 산따 마리아 성당을 하사했는데, 그는 옛 성당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끼에사 누오바"를 짓고,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으로 사용하였다.

이 즈음에 그는 "로마의 사도"로 알려졌고, 교황과 추기경 심지어는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필립보 사제의 친구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종교인들이 많은데 이냐시오, 카롤로, 카밀로,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 그리고 당시의 교황이 그들이다. 가난한 이들고 병든 이웃 그리고 미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자선이 넘치는 참된 종교적 삶은 기쁨이 넘치는 영혼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복음적 단순성, 하느님을 기쁘게 섬기는 데에 뛰어났다

 

성인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가령 교황 레오 11세는 그와 함께 담화하기를 즐기며 종종 4, 5시간이나 그의 방에 머물며 "이곳은 나의 낙원"이라고 말했고, 또한 클레멘스 13세나 그레고리오 14세는 전에 성인께 교훈 받은 것을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가롤로 보로메오와 이냐시오 성인은 필립보와 친밀히 교제하고, 또 대 음악가 발레스트리나는 기꺼이 그를 고해 사제로 모셨다.

 

보통인물 같으면 그러한 위대한 인물들에게 그렇게까지 존경을 받는다면 교만한 마음이 생겼겠지만, 필립보는 조금도 불손한 빛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겸손하며 그로 말미암아 진기한 행위를 감히 행하는 때도 있었다. 가령 수염을 한쪽만 깎고 넓은 거리를 걷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을때 일부러 아이들의 반말을 흉내내기도 하고, 이사할 때에 주방도구를 갖고 나와서는 우스운 행동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이는 모두 남게에 조롱을 받으리라는 겸손함 마음에서 행해진 것인데, 그의 높은 성덕을 아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점점 존경의 마음을 더 가져, 교훈을 청하는 이, 전구를 구하는 이들이 연달아 그를 방문했다. 그가 미사 성제를 거행할 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의 경건한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했다 한다.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무력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던 것이다.

 

1593년에 그는 건강을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으며, 병으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필립보는 병상에 누어서 벽에 걸린 주님의 십자가상에 손짓하며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저처럼 고통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계시는데, 이 미천한 저는 이런 호화스러운 자리 위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면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곁의 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1595년 5월 25일,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될 일을 모르는 자다"하는 말을 최후로 그 순결한 영혼을 하느님 아버지께 돌려 드린 것이다.

166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로부터 시성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171, 1-3. 5: PL 38, 933-935)

 

주님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지 세상을 두고 기뻐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누리는 기쁨이 날로 증가하고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은 날로 감소하여 사라지도록 하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세사에 있는 동안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이미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기뻐한다면 내가 있는 곳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분이 세상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우리 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해 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 그러면 어디에나 계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로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위에 드높이 오르시면서도 동시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 참으로 무한한 분이십니다. 멀고도 가까이 계시는 이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가까워지신 그분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전 인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못본 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부축하여 간호해 주고 돌보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불사 불멸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되시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합니까? 외아드님께서는 외아들로 홀로 남아 계시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홀로 죽으신 그분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은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피로써 형제들을 사들이시고, 당신께서 단죄받으심으로 단죄받은 이들을 구하시고, 팔려 가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시고, 모욕당하심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셨으며, 죽으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마십시오.

 

 

      

 

필립보 네리는 부패한 로마와 무관심한 성직자들을 배경으로 한 문예 부흥 이후의 전반적인 타락상에 대항하여 대중을 신심으로 유도한 귀항 운동의 기수이다.

젊었을 때 그는 사업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플로렌스에서 로마로 옮겨 하느님께 자신의 생활과 능력을 바쳤다. 3년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사제가 되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 후 13년간은 그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소명의 길인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면 살았다.

 

트렌트 공의회가 교의적 수준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있을 때 필립보의 인격적 호소로 말미암아 거지부터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과감한 영성에 압도된 몇몇 평신도들은 자기 주위에 재빨리 모아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기도와 토론을 하였으며 후에는 로마 교회의 필요에 따라 봉사를 하는 단체가 되도록 했다.

 

고해 신부의 권고로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언제나 친절하고 때로는 농담까지도 잘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착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아 훌륭한 고해신부가 되었다.그는 성당 위층에 있는 방에서 고해 성사를 보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과 다른 성당으로 산책을 가면서 어떤 때는 도중에서 노래와 간식을 곁들이기도 했다.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제가 되어 공동체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 이것이 그가 설립한 수도원이 오라토리오회의 시작이다.

 

그들 생활의 특징은 모국어로 된 찬미가와 기도를 바치면서 매일 오후에 4번의 비공식적 담화로 경배를 하는 것이다. 팔레스트리나는 필립보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전례를 위

한 음악을 작곡했다.오라토리오회는 평신도들이 설교를 하고 모국어로 찬미가를 바치는 이단적인 집회라고 오랫동안 비난을 받으며 시련을 겪다가 마침내 교회에서 인준되었다.(뉴만 추기경은 처음으로 영어로 말하는 오라토리오회를 만듬)

 

그 당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필립보의 충고를 따랐다. 그는 주로 교회 안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거룩한 인물로 만듦으로써 종교 개혁의 중요한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덕행은 겸손과 쾌활함이다.

 

많은 사람들은 필립보처럼 매력적이고 익살스러운 인물은 진지한 영성에 젖을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한다. 필립보의 생활은 신심에 대한 우리의 딱딱하고 옹졸한 안목을 변화시켜 준다.

성덕에로 향하는 그의 접근 방법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쾌활한 웃음을 동반하는 것으로 참으로 가톨릭적이다.필립보는 그의 추종자들이 성덕에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하여 비인간적이 되지 말고 더욱더 인간적이 되기를 바랐다.

 

 필리보 네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주소서.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참회를 해야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에도 성찬식의 ’환희의 찬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주고, 우리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축복받은 사람들’로 확신하게 해주면서 성스러운 잔치에 참여 할 수 있게 한다.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PIAZZETTA, Giovanni Battista

1725. Oil on canvas, 367 x 200 cm Santa Maria della Consolazione (Fava), Venice

 

 

 

 

 

♬7.Os Lusti-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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