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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쇄신은 교회의 존재 이유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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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범 [seead] 쪽지 캡슐

2002-07-24 ㅣ No.2580

게시자: 김동식(Urbanus) 교회의 쇄신은 교회의 존재 이유중에 하나다

게시일: 2002-07-24 02:57:20

본문크기: 9 K bytes 번호: 36494 조회/추천: 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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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22, 36324, 36443 등 일련의 쇄신을 위한 비판적인 글은 성직자와 사목회원(약칭)을 험담하고 폄하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평신도인 우리와 나 자신의 참회요 신앙고백이다.

 

쇄신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는 자나 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논거를 갖고 일말의 거부감을 갖는 자나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 단지 맡은 역할이 다를뿐이다. 그러므로 서로는 성토와 지탄의 상대가 아니라 화해와 일치의 대상이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회칙 [현대의 복음 선교] 제1부 15장에서 "복음화는 무엇보다 먼져 교회 스스로에게 끊임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설마하니 교황님께서 중국의 사서삼경을 읽고 깨치신건 아니시겠지만 大學의 제8장에서부터 10장에 걸쳐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래로 널리 인용 되는 이 문구는 기실 1장부터 7장까지의 전술이 있다. 格物致知 즉 사물의 본질의 이치를 구명해야 앎이 투철해 지고 앎이 투철해져야 생각이 성실해 지고 생각이 성실해져야 마음이 바로 잡아 지고 마음이 바로 잡아져야 몸이 닦아 지고 몸이 닦아져야.....로 이어지는 문장의 결구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佛家의 八正道 (定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가 있다면 교회에는 注賦三德(信德 愛德 望德)이 있다고 하겠다........

 

 

 

교회의 쇄신은 교회의 존재 이유중에 하나이다.

 

모든 존재성은 시공의 변천과 더불어 끊임없이 그 정체성을 쇄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제도교회도 예외일수 없다. 지상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우셨으나 인간이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2천년 교회사를 개관할 때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힘들게 미로를 방황했었는가를 허다하게 볼수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말씀 하신 교회 스스로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복음화가 곧 교회쇄신이다. 그러므로 쇄신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결코 부정적인것도 불경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들이 성격장애 인격파탄의 반골이 아니라면 모름지기 제도교회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중세의 몇세기에 걸쳐서 자행되었든 마녀사냥의 기득권자들의 권위유지를 위한 역학구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왕따는 무엇인가. 현상체계 방어 논리다.

 

성직자를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이 쇄신이라는 말 앞에서 일말의 거부감 내지는 불경 죄책감마져 갖는것도 사실이다. 쇄신의 소명을 위하여 우선 이러한 눌린 의식부터 당위적인 방향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사목자와 해방을 두려워하는 노예근성의 평신도와의 밀월이 쇄신의 일차적 장벽이다.

 

 

 

주교 서품 착좌예식은 그 거룩한 성사의 의미와 장관을 이루는 복색과의 함수관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영혼을 탐구하는 종교가 아직도 중세 전제 군주의 복식으로 교계질서의 위엄을 나타내려 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거창한 치장으로 위압적인 외형을 과시하는 것은 피사목자들의 의식이 아직도 무명하에 있다고 여기는 소치이거나 아니면 무참하리만큼 무명속으로 유도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거룩한 성사를 품위있게 봉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값비싼 보석과 옷으로 요란하게 치장한 여인에게서 때로는 공허함이나 환멸을 느끼는 것은 왜일가.......

 

더 어이없는 일들은 금빛 은빛으로 화려하게 번쩍이는 광경을 거룩하신 신의 위엄으로 착각하는 우리 평신도의 신앙의 단계이다.

 

쇄신이 필요한 자리를 에워싸고 출입을 막는 것이 다름아닌 평신도들이다.

 

쇄신은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이루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혁신은 언제나 민중으로부터 민중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선동하는 말이 아니다. 조금씩 각성하자는 말이다. 미국의 노예해방의 가장 힘든 적은 노예였다.

 

 

 

근년에 들어 교회의 일각에서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을 들여다 보자. 어느새 가난한 이웃 신자들은 보이지 않고 봉사단체는 언제부턴가 있는자들의 모임이 되어버렸다. 교회의 운영을 맡은 성직자나 평신도의 행적을 보면 가난한 신자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지경이 아닐수 없다는 지적이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구원사업을 펼치는 일이 교회의 사명일진데 이미 교회는 그 소명의 한귀퉁이를 포기하고 있는 현실이다. 수십억 수백억에 이르는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이나 수도원을 짓는 역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끌어 안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밀어 내고 있었다. 위로받고 싶은 자매 형제들이 소외되어 보이지 않는다.

 

냉담율이나 미사불참율이 상승하는 요인중에는 현대인들이 목말라하는 영성의 샘물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교회(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존립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세속주의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라 ’내가 곧 교회’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평신도가 지상의 천국인 교회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평신도가 세운 교회다.

 

게시판에 성직자에 대한 비판이 심심챦게 올라 온다. 물론 전체적으로 지탄을 받는 분 보다 그렇지 않은 분이 더 많으시고 개인적으로 보면 지탄을 받는 면 보다 그렇지 않은 면이 더 많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소봉대하여 거론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신품성사의 빛을 따라 그만큼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성직자는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타고 가야할 교회라는 열차를 운행하는 운전기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미롭게도 성직자를 나무 끝에 밀어 올리고 흔들고 떨어트리는것도 평신도다. 정녕 죄만스러운 작태를 연출하는 무명속의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땅의 교회에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언론 발행은 언제나 이루어 질것이며 평신도신학의 저변확대는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

 

진리의 광채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하는 사명을 띈 신학의 자유가 평신도의 저변에 무리 지어 꽃이 피어야 한다. 이 신학적 자유가 당연히 교회의 쇄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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