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11/07) *

인쇄

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11-07 ㅣ No.3740

연중 제32주일 (2004-11-07)

독서 : 2마카 7,1-2.9-14 독서 : 2데살 2,16-3,5 복음 : 루가 20,27-38 또는 20,27.34-38

*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었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38)

기쁨이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지 문득문득 놀랄 때 느끼는 느낌이다. 어느 평범한 날, 세워둔 차 쪽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거나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아주 평범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고, 아름답고 기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때가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참 좋구나!’
오늘 복음은 기쁨을 느끼며 살도록 해주는 것은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임을 깨닫는 순간이라 한다. 죽음도 부활도 하느님 안에 있으니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한다.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 함께하기 때문이라 한다. 복음이 말하는 살아 있음과 죽음, 부활을 묵상해 보자.

죽은 이들의 부활
대부분 평민 출신인 바리사이파가 성서와 같은 비중을 두었던 조상 전래의 전통에 대해서 사두가이파는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부활신앙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준비되고 제1독서가 말하듯 구약시대 말기에야 비로소 명확히 계시된다. 그래서 오경만을 성서로 고집하는 사두가이파의 입장에서는 부활신앙에 대한 성서의 근거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일반 백성의 확신에 동조하셨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들은 부활신앙이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점을 신명기에 나오는 혼인 형태에 관한 규정으로 입증하려 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행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 25,5-­6)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풍습 이면에는 종족 유지와 번식이라는 지상 과제에 충실하려 했던 옛 사람들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
유다인들의 부활신앙에는 부활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현세의 삶과 비슷한 삶을 계속 누릴 것이라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활 후의 삶이 현세 삶의 단순한 연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한 삶은 현세생활의 연장이 아님을 밝히신다. 부활이란 내가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 처음부터 늘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구나, 나는 이 일을 하도록 불렸지. 그래, 매일 새롭게 성실히 살아가자.’ 부활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부활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도록 불렸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을 받는다.(1요한 3,2;로마 8,21)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다면 그것은 그 삶이 다가올 세상에서 살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하느님 은총의 무상의 선물이다.(2데살 1,5) 하지만 부활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자격을 부여하신 이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바오로는 의인이나 악인이 모두 다시 살아나리라고 희망하였다.(사도 24,15) 하지만 의인만이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다.(루가 14,14) 예수께서 그들이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부활에 관한 이 토론에서 모세의 말을 들어 호소하신다. 불타는 가시덤불의 이야기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더 깊은 의미로 이해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선조들의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하느님을 숭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목적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신다. 사람들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 중간시기의 삶이나 또는 인간의 불멸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삶이 어떻게 해서 죽음 이후까지 계속되는지에 관해서나 또는 부활에 관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단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 있다는 말씀만 하실 뿐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편집부

- 오늘 그대를 만나면 -

오늘 그대를 만나면
거리를 걸을 땐
손을 꼭 잡고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손 안에 가득해 오는
그대의 체온을
느끼고 싶습니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그대를 만나면
거리를 걸을 땐
그대가 팔짱을 꼭 꼈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에 가득해 오는
그대의 호흡을
느끼고 싶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연인
이 사랑의 길을 가는
지상의 동행자입니다


- 용혜원의 詩중에서 -


님을 초대합니다


† 【 안나의 묵상나누기 】 †

+ :) +

"참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그런데 더 쉬라고 하네요.
다시 올릴 수 있을 때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하였습니다.
늘 말씀과 함께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유 야고보 수사"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신 야고보 신부님!

†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안나가요*^^*


 


2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