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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한국 순교 성인 (51위~103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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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홍 [clemenskim] 쪽지 캡슐

2005-08-28 ㅣ No.4383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
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
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 막달레나는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아가타)를 두었고 남편이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에 따라 딸과 함께 입교했다.
그후 신앙생활을 위해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이경이(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67은 딸, 65, 67과 함께 체포됨)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은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황사영의 백서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후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崔昌顯)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 으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친정 식구들의 생계를 도왔다. 항상 규칙적인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생활을 했고 뛰어난 교리지식과 열정적인 신앙으로 여회장 직을 맡아보며 무지한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며 외교인 자녀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교회 일에 적극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동생 현석문(玄錫文)과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로부터 주뢰 2차, 300여 대의 장(77)을 맞는 혹형을 당했고, 형조에 서도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信望愛)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많은 교우 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는 동생)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쌀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49는 어머니, 2는 오빠, 2, 49, 57과 함께 체포됨)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가정을 잘 돌보아 교우들로부터 모범 가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가정 뿐만 아니라 회장인 남편을 도와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 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 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고 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아우구스티노) 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로 순교했다. (62는 남편)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 조 바르바라,동생 이인덕(마리아)과 함께 천주교 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간 틈을 타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을 결심한 후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아버지에게 써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 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조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모녀 등과 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헌 할 겨를도 없이 6월 어느 날 이영덕은 습격한 포졸들에게 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66은 동생, 46, 47, 66과 함께 체포됨)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 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 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 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 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 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 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 바오로는 1839년 기해 박해로 체포될 때 도감(都監)의 병정이었다. 1839년 8월경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처음엔 잘 참았으나 하루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곧 배교를 취소했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후 허협 바오로는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1840년 1월 30일 45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옥사, 순교했다.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냈다.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55는 아내)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瑞山) 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9월 말 홍병주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 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7출)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하여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홍병주는 끝까지 버터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68은 동생)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 베드로와 결혼하면서 냉담했던 생활을 떠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와 성체성사를 받고부터는 더욱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6월 손소벽은 가족과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주뢰 3차,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로 순교했다. (50은 남편, 70은 딸, 40은 사위, 50, 70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 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 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 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2, 67과 함께 체포됨)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6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56은 언니, 46. 47. 56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 아가타는 어려서 아버지 권 진사가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따라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와 함께 입교했다.
13세 경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그후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의 간교로 어머니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는 이경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권진이는 이경이와 함께 사관청을 탈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 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교했다. (52는 어머니, 52, 65와 함께 체포됨)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형 홍병주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후 9월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63은 형)
일명 ‘경천’으로도 불리는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 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독신생활을 원하였으나 양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어린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에서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체포된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되었다.
이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 하지 않을 수 있는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 들을 재촉해서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 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 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 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 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 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 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 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 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 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난 우술임 수산나는 15세 때 인천의 한 교우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2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풀려나왔는데,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후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의 집에서 몸붙여 살다가 역시 과부인 이간난(아가타)과 함께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 나자 김 신부의 집에 있던 여교우들은 이 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이 간난도 여교우들을 따라 새 집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우술임만이 남아 혼자서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몸으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44세였다.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 요셉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1830년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호의적으로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대하기만 했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 수영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했다.
며칠 후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처음으로 김 대건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 순교를 결심했다. 드디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 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이미 수정할 결심을 하고 그후로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베드로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고,
1839년 기해박해 후에는 이문우 요한의 양어머니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았으며, 1845년부터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던 현석문 가롤로는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 포졸들이 새 집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해서 현석문, 정철염, 이간난 등과 함께 체포된 김임이는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나이는 36세였다. (72, 78. 79와 함께 체포됨)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간난 아가타는 18세 때 결혼하여 3년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외할머니의 권유로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로부터 성세(세례)성사를 받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이 간난은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7월 11일 피신해 있던 집에서 현석문, 김임이,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되어 9월 20일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상태로 6명의 교우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72, 77, 79와 함께 체포됨)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는 경기도 수원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 하인으로 들어 갔는데, 주인집 가족의 한 교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0세 되던 해 동지날 주인으로부터 미신행위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거부함으로써 주인에게 혹독한 벌을 받았고, 이듬해 봄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자 그녀는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았다.
그후 1845년 김대건 신부의 하녀로 들어갔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 되자 현석문 가롤로 회장이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다가 7월 11일 현 회장, 이간난, 김임이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성녀 정철염은 용감히 이겨 냈다.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3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72, 77, 78과 함께 체포됨)
성 유정률 베드로는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읜 후로 짚신을 엮어 팔아 어렵게 생활 했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교리를 배운 후 곧 상경하여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지난날의 방탕했 던 생활과 아내를 난폭하게 학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로 자신의 몸 을 매질하며 오직 극기와 인내로 생활했다.
그의 아내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에 감동하여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이나 한 듯 "안녕히들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 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하고 하직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날 저녁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읽고 있던 중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같이 체포된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그는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할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했으나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은 배교 한 교우 100여 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했다.
결국 유정률은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한 것이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했다.
이러한 성 유정률 베드로의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 (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 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 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 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한국 성은 백(白),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 사제가 된 백 신부는 서품되자 곧 동료 김, 민, 서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의 고백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잡힌 이튿날인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끝에 3월 7일 새남터에서 장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 이 땅에 온 지 채 1년도 못되는 이 젊은 사도는 땀보다는 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현양하였다.
한국성은 김,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선교사.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배속되었다.
김 신부는 순교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천성이 온순 하고 친절하여 한국말은 아직 서툴렀으나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낸 8개월 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손골에서 잡혀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장 주교, 백, 서 신부에 뒤이어 네 번째로 참수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에 불과했다.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 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 (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일명 ‘승연’으로도 불리는 성 전장운 요한은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생계를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꾸려나갔다.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구류간에 1개월 동안 갇힌 적이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후 열심한 어머니의 권유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 고해 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그후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 베드로,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얼마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적발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 되었다.
포청에서 1회의 신분, 의금부의 국청에서 9회의 신문과 2회의 형문, 그리고 신장 32도를 맞은 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나이는 56세였다. (87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86과 함께 체포됨)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3월 23일 사형 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갈매못’에서 안 주교,민 신부,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안 주교를 체포할 때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기별을 받았 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는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이 천주교인임을 알고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 했으나 굴하지 않자 해미로 보냈고, 해미에서 손자선은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손자선은 5월 18일 공주옥에서 2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일명 '계식'으로도 불리는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임천에서 천주교를 알아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로 인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고 있었다.
한때 고을의 원을 지내기도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까지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원 5일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한재권 등과 체포되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로 순교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옥중에서 항상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 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고 하며 진심으로 자신의 순교를 기뻐했다. (98, 100과 함께 체포됨)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곧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다.
한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1864년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했고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전라 감사의 지시로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서 조화서는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아들을 격려했고, 아들 윤호는 "저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하고 격려하며 부자가 서로 순교를 각오했다.
6, 7차의 신문을 아들과 함께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거부하고,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아들 윤호도 10일 후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102는 아들, 99, 101, 102와함께 체포됨)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96, 10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재덕'으로도 불리는 성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지방으로 퍼지고 전라도 지방에서도 전라 감사의 지시로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할 때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서는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나의 하느님을 버릴 수는 없읍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부지런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7, 101, 102와 함께 체포됨)
성 한재권 요셉은 태중 교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나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박해로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 직책없이 교회 일에 충실했다.
1866년 12월 5일 한재권은 전라 감사의 명으로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에까지 찾아와 배교 할 것을 간청했으나 한재권은 "아버님,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31세로 순교했다. (96, 98과 함께 체포됨)
일명 '원조'로도 불리는 성 정원지 베드로는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지방으로 이사했고,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화서가 체포되던 날인 1866년 12월 5일 정원지는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 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끌고가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다.
지극한 효성 때문에 노모를 생각하고 여러 번 눈물을 흘리다가 함께 체포 된 성지동 교우들의 위로와 권유로 끝까지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다. 드디어 12월 13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97, 99, 102와 함께 체포됨)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 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했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아버지와 함께 6, 7차의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곤장 16도를 맞은 후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7은 아버지, 97, 99, 101과 함께 체포됨)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11월 가족, 마을의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 소위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다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형이 집행 될 때까지 기쁨과 여유를 갖고 기도하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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