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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축일♬Traditor Autem-Benedi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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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2-20 ㅣ No.802

 

축일 : 12월 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St. Peter Canisius 1521~1597. 예수회.

사제.신학자.교회박사.

"독일의 두 번째 사도"네델란드.

 

네델란드 니멘겐에서 9차례나 선출된 시장의 아들로 1521년 5월 8일 태어난 베드로 카니스(애칭)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퀼른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파브르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곧 그의 설교는 유명하게 되었다.

 

 

파브르 신부.

예수회 www.sogang.ac.kr/~gesukr/index.html

 

그는 트랜트 공의회의 두 회기에 참석하였고, 성 이냐시오가 메씨나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번째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바바리아의 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를 요청하므로, 그는 1549년에 인골슈탓트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베엔나에서도 하였는데, 그의 명성은 이 지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가니시오는 프로테스탄트를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므로, 이제 그는 같은 주제에 대하여 저술을 하기 시작하여, 최초로 자신의 "가톨릭 교리서" 첫판을 1556년 발간하자, 큰 선풍을 일으켜, 즉시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또 1556년에 프라그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하여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였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65년 사이에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에 있었다. 그는 아주 정력적인 사람이었으니, 30년 동안 도보로 혹은 말을 타고 20,000마일을 여행하면서 선교한 사람이다. 후일 그는 딜렌겐, 인스부룩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597년 스위스의 프리부르그에서 교육에 전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을 할만큼, 트렌트 공의회를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의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을 감지하였으므로,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와 레오(대)의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예로니모의 편지를 비롯하여 순교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 등등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소위 종교 개혁이라는 일대 지진의 근원지라 할만한 독일이 교회 전멸이란 비운을 모면하게 되고, 그 국민 인구의 약 반 수가 참된 신앙을 보존하며 오늘에 이른 것은 온전히 베드로 가니시오의 열심한 기도와 희생과 활동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오늘날 성 보니파시오 다음으로 "독일의 제2의 사도"로 공경을 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1925년 시성되었으며, 교회박사로 선언 되었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저서에서

(Edit. O. Braunsberger, Petri Canisii Epistulae et Acta, I. Friburgi Brisgoviae, 1896, pp.53-55)

 

"나의 선교 사명의 원천은 예수 성심에 있습니다."

 

"독일의 제2의 사도"라 칭하여 마땅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는 임지인 그 나라로 떠나기 전 교황의 사도적 축복을 받을 때 자신이 느낀 강력한 영적 체험을 다음의 말로 기술하고 있다.

 

"영원한 대사제이시여, 당신의 엄청난 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도적 축복은 바티칸에서 당신의 지도하에 그렇게도 많은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사도들이 확인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그 중재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은총이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볼 때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들은 내가 독일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을 축복하고 확인해 주며 독일의 사도로 임명된 나에게 그분들의 도움을 약속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여, 당신은 그날 얼마나 신중히 독일을 내 손에 맡겨 주셨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독일은 언제나 내 마음이 집착될 곳이고 또 내가 그를 위해 살고 목숨을 바칠 곳이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그때 나로 하여금 당신의 성심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을 마시게 하시고, 내 구세주여, 당신은 내 구원의 물을 당신의 샘에서 퍼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그 샘에서 나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기를 가장 원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을 바라보고는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입히시며 꾸며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감미로운 성심에 도달하여 거기서 내 갈증을 충족시켰을 때에 당신은 내 영혼의 헐벗음을 입히시고 내 사명을 훌륭히 완수할 수 있도록 세 겹으로 된 옷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 겹의 옷이란 평화와 사랑과 항구심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옷을 입을 때 나에겐 부족함이 조금도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날 것임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521년 5월 8일은 교회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이유는 예수회의 창설자 스페인의 성 아냐시오 로욜라가 종교계에 헌신하기 위해 군대에서 나온 날이며, 독일의 이단자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라는 마을에서 개최된 종교회의 결과 추방된 날이고, 또한 독일의 제2회 사도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네덜란드의 니멘겐에서 9차례나 선출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본다면 모두 우연한 일치로서 세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 하느님의 섭리에 기인되는 깊은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래 기록되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전기를 한 번 읽어보면 모두 명백해질 것이다.

 

베도로의 부친은 니멘겐의 시장에 선출된 적이 전후 9차례나 되었고 또 한 국가에 진력한 공로로써 귀족이 된 경력을 가진 부유한 토지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어려서 부터 충분한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타고난 재주로 말미암아 학문 면에 탁월한 성적을 나타냈고 15세로서 쾰른 대학에 들어가서 4년 뒤에 벌써 박사 칭호를 획득했다.

 

종교방면으로는 경건한 부모의 훈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특별히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쾰른의 대학교수 니콜라오 에슈의 감화를 받고 자기 일생의 사명이 이 방면에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마침내 30세에 정결 서원을 발해 온 몸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어느 수도원을 선택하는가가 그의 고민거리였다. 그의 가장 친하던 친구가 카르투시오 수도회(게시판690번,679번참조)에 들어간 것을 보고 자기도 그의 뒤를 따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성녀와 같은 어느 여 교우에게 "이 아이는 장차 교회를 개혁할 새로운 수도원의 사제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 비슷한 말도 들었고 해서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이냐시오 로욜라(축일:7월31일.게시판586번)가 창립한 예수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연히 로욜라에게 처음부터 배운 여섯 제자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 파브르 신부가 쾰른시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각 파브르를 만나 그 수도회의 목적과 모든 내용을 상세히 문의 했다.

 

파브르는 이에 일일이 친절하게 대답해 준 다음 로욜라가 시작한 심신수련의 방식에 따라 그에게 30일간의 피정을 하도록 했다. 가니시오는 크게 감동을 받아 피정이 끝나자마자 예수회에 입회하기를 원하며 로욜라에게 수도복을 수여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의 소원대로 착복식이 있게 되었는데 그 날은 신비롭게도 1543년의 그의 생일이었다. 그 뒤부터 그는 예수회의 사명, 즉 루터 등의 이단에 대항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그중에서도 가장 혼란을 일으키던 독일 등을 그의 이단에서 건질 목적으로 천성적 웅변과 문필로써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프로테스탄드들이 주장한 성서 자유해석의 오류를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 마태오 복음이나 바오로 서간경, 성 치릴로나 성 레오 등 모든 교부의 저서들을 아주 쉬운 문장으로 일반에게 소개했다.

 

또한 벨기에의 루벵이나 독일의 보름스 등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세던 곳에 파견되어 가서 가톨릭을 옹호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독일 황제가 이듬해 쾰른 시를 통과할 적에 그는 황제를 뵈옵고 쾰른 교구의 이단에 의한 비통한 혼란을 설명해 그 구제 방법으로서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 대주교 등을 파면시키고, 파문을 내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급한 일이라고 하며 황제의 협력을 간곡히 요청했다.

 

독일의 서부지방이 프로테스탄트이 지배에서 모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이 같은 베드로 가니시오의 노력과 활동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45년 가니시오는 신품 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어 점점 교회를 위해 진력할 결심을 굳게 했다. 그 당시 그가 속하고 있던 수도원의 원장은 "베드로 가니시오는 진주처럼 귀중하다. 그는 모든 점으로 보아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하고 극구 칭찬한 일도 있지만 이것을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완덕을 구하고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있었던 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해 트리엔트 공회의에서 베드로 가니시오는 아우구스부르크의 주교 오토 추기경의 명을 받들어 겨우 26세의 약관으로 출석해 모든 주교들 앞에서 당당히 제 의견을 피력하기를 두번, 훌륭히 그 직책을 완수했다.

 

공회의가 끝나자 그는 거기서 로마로 가서 비로소 자기 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로욜라와 대면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의 그의 즐거움은 어떠했었을까! 그는 친히 로욜라를 만나 그 숭고한 인격에 감동되어 "나의 전폭적인 신뢰를 둘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는 신념을 일층 더 굳게 가지게 되었고 그에게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즉 독일의 바바리아 왕 윌헬모 4세가 루터의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 착한 지도자를 파견해 줄 것을 교황청에 간청했을 때 로욜라가 가니시오를 첫째로 추천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베드로 가니시오는 바바리아 왕국 인골슈탓트 시의 신학자로 독일에 돌아가기로 되었을 때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참배하고 하느님의 강복을 기도하자 주 예수께서 나타나 당신의 성심을 여시거 충만된 은총을 그에게 부여하셨다고 전해 내려온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바라리아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빈, 보헤미아의 프라하, 폴란드 증지에도 순례하며 교회의 진리를 명백히 하고 이단의 오류를 논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1556년 독일 전국의 예수회 관구장에 임명된 후 부터는 그는 더욱 바빠졌다. 그러나 그가 활약하는 무대는 어디서든지 교회가 세력을 회복하는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더욱 쇠퇴해졌다.

 

1559년 독일 황제 페르디난도가 아유구스부르크에 회의를 소집하자 가니시오도 초대되어 그곳을 방문했고 그때 가니시오는 황제와 추기경 오토 앞에서 독일에 있어서의 교회 쇠퇴의 비참한 상태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나서 아울러 이의 대책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다.

 

예컨대 그것은 국내의 왕후(王侯) 귀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교회를 원조할 것, 소신학교를 많이 설립해 착한 성직자 양성에 노력하며, 가난한 사제 지원자 후원의 기부금을 마련할 것, 청년들의 정결을 보존하기 위해 성모마리아 신심회를 일으킬 것 등이었다.

 

그리고 그 회의 도중 가니시오는 대성전에서 강론을 했는데 처음엔 겨우 50명 가량의 신자밖에 안왔으나, 그의 친절하고도 착한 지도로 인해 수 개월 뒤에는 9백명 정도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개종하는 등 동 시민의 종교열은 일시에 높아졌다.

 

그가 불행히도 이단에 빠진 자들에 대해 얼마나 동정심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가는 언젠가 "아, 나는 그들의 영원한 영혼 구원을 위해 또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로서 내 피를 흘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한 말씀으로 넉넉히 알 수가 있다.

 

또 베드로 가니시오가 신자들을 위해 교리서를 편찬해 진리의 이해와 종교에 대한 흥미를 돋구어 주었다는 사실은 이미 독자도 알고 있을 줄로 믿는다.

 

그는 전쟁 마당에서 맨 앞에 서서 달려가는 용감한 장군과 같이 일신의 위험도 무릅쓰고 프로테스탄트가 가장 성 한 지방에까지 들어가서 진리의 총칼을 휘두르며 이단의 전멸을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공로와 학식을 인정받아, 교황이나 황제로부터 주교 및 추기경의 지위에 오르도록 권고 받았으나 겸손한 그는 그 지위에 천만 부당하다고 하며 끝끝내 고집하며 사양했다.

 

그리고 60세가 된 후부터 칼빈파 이단이 성한 프라이부르크 시의 선교사가 되어 수년 후에는 시민의 대부분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성인처럼 이같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일생을 용감한 전투속에 살아온 베드로 가니시오는 76세의 고령으로 병에 걸려 갖은 고통을 잘 참아 받은 후 마침내 1597년 12월 21일 운명했다.

 

 

 

 

 

 ♬18.Canto Gregoriano-Traditor Autem-Benedi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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