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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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7-04 ㅣ No.1012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누구세요?"

"나다. 니 오빠."

철민이는 여름 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 지윤의 집을 찾았다. 대회를 목전에 두

고 경기 향상을 위해 선수들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날이었다. 철민은 지윤이

네를 별 다른 목적 없이 찾았지만 지윤에게 좀 소홀했다는 것을 느꼈다. 한 학

기 등록금과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받은 돈들이 철민의 통장에 고스란히 있다. 철

민은 미안한 생각이 든 지윤이를 위해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아파트를 찾았다. 철

민은 분명 현주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런 현주보다 지윤이를 훨씬 챙겨 주

는 편이었다. 지윤이와 더 친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예전부터 철민이는 지윤

이가 자신만의 친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현주야 어짜피 마음엔 품고 있지

만 아직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이였기에 오래 못 봐도 가지고 있던 느낌들과 생

각들이 변하지 않았으나 지윤이는 그렇지 못했다. 오랜 시간 못 보면 미안한 생

각이 들었고, 그리고 일상에 대한 생각이 잊혀 질 정도로 훈련에 시달려도 지윤

이는 항상 자기 곁에 있다는 생각으로 한 번씩 만나야 했다. 철민이는 훈련 때문

에 지윤이를 한 달 이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윤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

었다.

"아직 살아 있었네."

"그럼 살아있었지."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오빠 도대체 뭐하는 거야. 연락을 해도 항상 집에 없고

말이야."

"내 사생활에 너무 간섭 마라. 지윤이는 있냐?"

"있어. 방금 어디 갔다 와서 지금 샤워 중이야."

"그러냐. 좀 들어 가자."

철민이는 똑바로 거실로 들어 갔다.

"참 오빠."

"왜."

"집에 언제 내려 갈거야?"

"집? 나 한 2주는 더 서울에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뭐 하라고."

"너 혼자 내려가 임마."

"거 들고 있는 건 뭐야?"

"선물. 니 것도 하나 있다."

철민은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선물인데?"

"지윤이나 너나 아직 화장을 안하고 있잖아. 화장품을 내 맘대로 샀지."

"정말? 내 것은 뭔데?"

"모이스쳐 크림."

"참 내. 그게 화장하는 거 하고 상관있는 품목이냐? 어디 봐 바."

"좀 있다 지윤이 나 오면 봐. 근데 얘는 샤워하러 들어갔다면서가 시간을 왜 이

리 끄냐. 목욕하는 거 아냐?"

욕실 문이 열렸다.

"어머!"

"언니!"

지윤은 철민이 와 있는 걸 몰랐나 보다. 비키니를 연상 시키는 속옷만 입고 거

실로 나오다 철민을 보자 깜짝 놀라 다시 들어 갔다. 철민은 머쓱해서 씩 웃었

다.

"철민이 와 있었니?"

조금 부끄러움 섞인 목소리가 욕실에서 나왔다.

"나는 봤다."

"미안해 언니, 오빠 왔다는 소릴 못 해서."

"괜찮아. 혜지야 나 옷 좀 갖다 줄래. 여기 옷은 젖어서 못 입겠어."

"내가 갖다 줄까?"

철민이는 농담삼아 말을 던졌다. 방금 전의 머쓱했던 느낌을 풀고자 하는 의도

였다.

"사양 하겠어. 너 참 오랜만이다."

혜지가 후다닥 지윤이 방으로 갔다가 옷을 꺼내 왔다. 욕실 문이 조금 열리고

미끈한 팔 하나가 나오더니 그 옷을 받아 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철민

이가 물었다.

"원래 저러냐?"

"뭐가?"

"지윤이가 원래 저렇게 조심성이 없냐고."

"조심성 없는 게 아니지. 오빠 온 줄 몰랐으니까 저러는 거지. 나도 집에 언니

만 있을 때는 속옷 입고 잘 돌아 다녀."

철민이는 아까 지윤이의 볼륨감 있는 속옷 차림을 잠시 보고선 생각하지 못한

한가지를 느꼈다.

’지윤이도 이젠 여자구나.’

현주에 비해서 많이 어려 보였던 지윤이도 이제 서서히 철민에게 여자로 인식

되어져 가나 보다.

지윤이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얼굴엔 아까 속옷

차림을 들킨 부끄러움 보다 반가움이 많이 스려 있었다.

"나 왔다."

"그래. 연락 좀 하고 살아라."

"나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래. 너도 이제 제법 여자 티가 난다."

철민이는 아까 속옷을 본 그 느낌을 말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윤이의 얼굴은 불

거졌다.

"너 여전히 짓궃구나."

철민이는 지윤이와 인사말을 주고 받은 다음 자신이 사온 선물을 자랑스럽게 건

네 주었다.

"이거 다 합하면 상당히 돈이 많이 들었겠다. 너 무슨 아르바이트 하니?"

"아니여."

"헤, 이거 다 나 주는 거야?"

"그래 그거 다 언니 주는 건가봐. 거기 모이스쳐 크림 하나만 빼고. 그건 내 꺼

래. 오빠 나중에 두고 봐."

혜지는 지윤에게 선물한 화장품들이 자신의 것과 비교해서 너무 많자 속이 상

이 상한 어투로 말했다. 정말 갖가지 화장품들이 다 있었다. 필자가 화장품에 대

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름들을 열거 할 수는 없다. 하여간 졸라 많았다.

"화장품을 왜 이리 많이 산 거야?"

철민이 자신도 그 사실을 잘 몰랐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화장품 점에서 성숙

해 보이는 현주와 지윤이가 약간 비교가 되었었다는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철민이는 기분이 좋았다. 지윤이가 함박 웃음 짓는 밝은 모습을 보았기에.

 

한량대는 처음 경기를 무사히 승리로 마쳤다. 다음 경기 까지 이틀이 남았다.

그 사이 자신의 동생과 지윤도 집으로 내려 갔다. 조금 허전했지만 경기장에 있

는 철민은 외롭지 않았다. 철민이는 출전자 명단에 기입 되지 못했다. 저번 소요

사태도 있고 해서 기량은 늘었지만 감독은 명단에 철민이를 기입하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철민이는 그냥 덕아웃 벤취에서 선수들이 뛰는 모습만 봤다. 철민

이는 불과 몇달 전만 해도 경기장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을 했었다. 하지만 이

번 대회는 달랐다. 심하게 경기에 뛰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그렇지만 그 욕구

는 충족 되어지지 않았다. 한량대는 준결승까지 올랐다. 준결승에서 풋내기 신

인 투수에게 무참히 짓밟힐 때까지 승승 장구 했었다. 준결승은 년쎄대와 붙었

다. 철민이는 덕아웃 벤취에서 상대편 투수에게 맥없이 물러나는 자기 팀의 타자

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철민이 옆에는 찬오가 있었다. 찬오는 8강전에

서 중간 계투로 나와서 그런데로 잘 막고 오늘은 그냥 관망하는 자세로 벤취에

앉아 있었다.

"쟤가 너 고등학생일때 전체 서열 일위였던 녀석이었냐?"

"예."

철민이가 그런 찬오와 말을 주고 받았다.

"쟤가 너보다 공이 빠르냐?"

"그건 아닌데요."

"그럼 나보다 공이 느리겠다?"

"그렇지요. 하지만 투수가 공만 빠르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너는 서열 몇위나 되었냐?"

"나는 삼,사위 정도 됐을 거에요."

"그럼 서열 이위는 누구였냐?"

"고래대로 간 조승민이라는 애가 있어요."

"걔도 공이 빠르냐?"

"상당히 빠르지만 형보다는 못해요."

"음, 공 빠르기에 있어서는 나를 당할 자가 없다 이거지. 하하."

"잘 해 보세요. 빨리 벤취 신세 면해야지요."

"그래 참 나는 벤취 신세지. 지금 기분 좋아 할 때가 아니구나."

철민이를 비롯해 한량대 야구부 전원은 그날 기분이 좋지 못했다. 한량대

는 그날 경기에서 그 년쎄대에게 완봉패 당하고 결승 진출이 무산됐다.

 

철민이는 휴가를 받았다. 집에 내려 가 푹 쉴 요량이었으나, 현주도 지윤이도

자기 동생도 모두 다시 서울로 올라 와 있었기에 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틀

만 집에 있다가 바로 서울로 돌아 왔다.

"아버지, 어머니.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울로 바로 올라 가겠습니다."

"공부 하는 놈 치고는 얼굴이 너무 탄 것 같다. 너 어디 싸 돌아 다니는 거냐?"

"서울에는 공기가 나빠서 자외선이 많대요. 제가 또 민감성 피부고 해서 얼굴

이 남들보다 좀 더 탄 것 뿐입니다."

"하여간 열심히 해라. 이번 학기 성적표도 에이가 없더라."

철민이는 거짓말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하고 있다는 소

리는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말하면 야구를 중도 포기해야 될 것

같았고 자기는 야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야구를 포기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중에 훌륭한 선수가 되면 떳떳하게 말할 날이 올것이라 굳게 믿었다.

 

서울로 올라 오자 마자 철민은 지윤을 찾았다. 그리고 현주도 만나 볼 것이라

생각했다. 철민은 지윤이를 시내로 불러 냈었다. 철민이는 지윤이를 보자 꿈쩍

놀랐다. 단 이주 사이에 지윤이의 모습이 너무 바뀐 것이었다.

"너 지윤이 맞냐?"

"응. 왜 못 알아 보겠어? 이거 너가 준 화장품 덕이야. 나 예뻐 진것 같니?"

철민이의 눈에 지윤이의 모습은 완전한 숙녀의 모습이었다. 짙은 화장은 아니었

으나 지윤의 화장한 모습은 서툴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너 화장하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냐?"

"응? 집에 있을 땐 엄마에게 배웠고, 서울에 와서는 현주에게 좀 배웠지."

"그러냐? 너 혹시 화장품 그거 내가 사준 거라고 자랑했냐?"

"응."

"현주가 아무 말 않디?"

"응."

"현주도 사 주어야 겠구만 쩝."

철민이가 고개를 돌리고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이 새끼 카사노바여? 글쓴

이 생각이니까 없는 셈 치세요.

"뭐라고 그랬어?"

"아니야."

"예쁘진 것 같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응? 뭐가?"

"졸라 예뻐졌다 그래."

철민이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만의 친구가 진짜 예쁘다는 걸 실감하고선 말이

다. 그날은 지윤이가 팔짱을 껴도 철민이가 ’팔 빼.’라는 소릴 하지 않았다.

 

철민이는 지윤이가 점점 여자로 보여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현주를 마

음에 품고 있다. 철민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도 지윤이가 아니라 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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