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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축일♬18.Traditor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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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19 ㅣ No.1169

 

Madonna and Child between St Francis and St Bernardine of Siena - GOZZOLI, Benozzo

1450. Fresco. San Fortunato, Montefalco

 

 

 

Saint Bernardino - GRECO, El

1603 Oil on canvas, 269 x 144 cm Museo del Greco, Toledo

 

 

 

축일: 5월 20일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

St. Bernardinus di Siena, C

작은형제회.1382-1444년

 

베르나르디노 알비제스키는 이탈리아 시에나 근교의 마싸시에서 시장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알비제스키 가문은 그곳에서 전통적인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7 살 때 부모를 여의었는데 그 이후로 친척들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경건한 신앙심을 나타내 보였고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신심을 마음에 품었다.

그는 모든 덕성들 중에 특히 정결의 덕을 사랑했으며 모든 일에 대해서 온유하고 우호적이었지만 예의 범절에 벗어날 때에는 무섭게 화를 내었다.

1402 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책을 받았다.

천성적으로 약하고 쉰 듯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성모님의 도움으로 곧 유명한 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설교 주제는 주로 지극히 거룩한 예수의 이름과 자비의 모후인 마리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형제회 내에서 회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려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많은 공로와 덕행을 쌓고 하늘 나라로 올라간 뒤 6 년 후 니꼴라오 5 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Madonna and Child with Sts Francis and Bernardine, and Fra Jacopo - GOZZOLI, Benozzo

c. 1452 Tempera on panel, 34 x 54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대부분의 성인들은 개인적으로 크나큰 반대에 부딪히고 박해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베르나르디노 성인은 세상의 필요에 순응하며 단순하게 살아간 활력에 넘친 성인이다.

 

그는 그 당시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서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분열로 만신창이가 된 도시들을 진정시키고 널리 퍼져 있는 이교도들을 비판하였으며, 3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악습과 덕행, 형벌과 영광’에 관한 설교를 함으로써 성프란치스코의 충고를 따르게 했다.

 

성베르나르디노는 시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직관과 확고한 성덕, 줄기찬 활력 그리고 기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허약한 몸에 쉰 목소리를 지녔음에도 이 모든 일을 잘 해냈다. 그의 목소리는 나중에 마리아께 대한 그의 신심 덕분에 기적적으로 좋아졌다.

 

그가 20세였을 때 그의 고향 시에나에서는 전염병이 한창이었다. 때로는 하루에 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어 갔다. 그는 재앙을 면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온 병원을 뛰어다니며 4개월 동안 그곳에서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몇 달 동안이나 고열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주머니-그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함-를 돌보면서 몇 해를 보냈고,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재를 지키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22세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2년 후에 서품을 받았다. 거의 12년 동안 그는 고독과 기도 가운데서 살았지만 그의 재능은 결국 그를 설교하러 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걸어서 여행했으며 때로는 한 장소에서 여러 시간 동안 연설하고 또 다른 도시에 가서 같은 일을 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알려진 베르나르디노는 IHS-예수님의 희랍어 이름 첫머리 세글자-를 빛나는 태양 광선에 고딕체로 쓴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당파의 표적처럼 당시의 미신적인 상징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신심은 퍼져 나갔고 그 상징도 교회와 가정,공공 건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것이 위험한 쇄신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다. 교황이 그에게 해가 될 활동을 하도록 만들려는 시도가 세 번이나 있었으나 베르나르디노의 성덕과 정통성 그리고 지성은 그의 충실을 명백히 증거했다.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는 탁발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의 총장 대리로서 그는 학문을 매우 강조했고 특히 신학과 교회법 연구를 장려했다. 그가 처음 수도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3백 명이었던 수도자들이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4천 명으로 늘었다. 그는 죽은 지 6년 후인 1450년에 시성되었다.

 

또 다른 활동적인 성인이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여러분의 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을 돕는 일이라면 나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비용을 당하겠고 또 나 자신을 온통 희생하겠습니다." (2고린 12,14-15)

 

우리가 베르나르디노에게서 신앙의 걷잡을 수 없는 활동-병자를 돌보고, 설교하고, 연구하고, 관리하고, 언제나 돌아다니는-만을 보고 그 활동력을 원천을 잊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베르나르디노가 프란치스코처럼 기회가 있었다면 뛰어난 관상 수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는 매일매일의 기회를 포착했고 그것을 활용했다.

 

성베르나르디노는 볼로냐에서 도박의 악습에 대해 신랄한 설교를 했다. 관습대로 공공 광장에서 거창한 불을 피워 놓고 온갖 악습의 도구-카드나 주사위 등-를 태워 버리는 예식을 거행 했다. 이에 카드를 만드는 공장 주인은 베르나르디노가 자기의 생계 수단을 빼앗아 갔다고 불평했다.

성인은 그에게 IHS 마크를 만들기 시작하라고 권했으며 그는 전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Saint Bernadine of Sienna(Franciscan)

St Charles Baorromeo Church.소장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강론에서

(Sermo 49, De glorioso Nomine Iesu Christi, Cap 2:Opera omnia 4,

505-506)

 

예수의 이름은 설교자들의 광휘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설교자들의 광휘입니다. 그 이름은 설교자의 말과 듣는 사람의 말을 광휘로 비추어 줍니다. 예수의 이름때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신앙이 그렇게도 밝게 신속히 또 힘있게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생각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도 이 이름이 지닌 빛과 감미로움으로 "당신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빛 가운데서 빛을 보고 조명된 이들에게 사도 바울로가 하는 다음 말씀은 적합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가리면 안됩니다. 널리 빛을 발하도록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파할 때 불순한 마음이나 불결한 입으로 선포해서는 안되고 뽑히운 잔 속에 안전하게 보관하고 또 전수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사도란 "뽑히운 잔"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잔에는 매우 향긋한 술이 판매용으로 전시되고 그 술은 뽑히운 잔 속에서 반짝이고 빛나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어 줍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주님은 덧붙이십니다.

 

들판에 불을 질러 잡초를 제거할 때 건조하고 쓸모 없는 덤불과 가시 떨기는 타서 없어집니다. 태양이 떠 빛살이 어둠을 몰아낼 때면 도둑이나 밤중의 배회자나 강도들은 몸을 숨깁니다. 이처럼 바울로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그것은 마치 요란한 천둥소리나 굉장한 위력으로 타오르는 불 또는 이전보다 더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같아서 불신앙은 파괴되고 그것은 사라졌으며, 진리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촛불처럼 온 세상을 비추어 나갔습니다.

 

바울로는 말과 편지와 기적과 표양으로써 예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끊임없이 찬미했고 그를 고백하면서 그 이름에다 영광을 돌렸습니다. 더욱이 바울로는 그 이름을 빛처럼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바울로는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든지 예수님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파하면서 그분을 촛대 위에서 활활 타며 빛나는 빛처럼 모든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부인 교회는 바울로의 증언에 기초하여 예언자와 더불어 즐거워 하며 말합니다. "하느님, 젊어서부터 날 가르치셨으니, 묘하신 그 일들을 이때껏 일컫나이다. " 즉, 언제나 전하리이다. 예언자는 역시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주께 노래불러 드려라. 그 이름을 찬미하라. 나날이 구원하심을 널리 퍼뜨려라. "즉, 구세주 예수를 선포하여라.

 

 

 

 

성 베르나르디노는 15세기에 있어 이탈리아의 유명한 설교가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중 가장 세상에 알려진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의 이름 베르나르디노라 함은 작은 베르나르도라는 뜻인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흡사한 점이 적지 않다.(축일:8월20일.게시판598번.시토회)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성모 마리아의 탄생일인 9월 8일 시에나 시에서 가까운 마싸 마리티마의 지사 아들로서 베르나르디노 데글리 알비쩨쉬에서 태어났다.

아직 7세가 못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신앙심이 깊은 백모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11세에 이르자 통학을 하기 위해 시에나에 있는 백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의 성격은 사교적이고 극히 쾌활 명랑하고 농담을 좋아했으나 다만 지저분한 말은 싫어하며 누가 이런말을 하기만 하면 기탄없이 이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와같은 결백한 점은 친구들 간에도 널리 알려져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나쁜 말은 삼갔다고 한다. 그가 이와 같이도 정결과 결백을 사랑한 중요한 원인은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께 대한 깊은 존경과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시에나의 가모리아 문에는 아름다운 하늘의 모후의 성상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청년 베르나르디노는 틈만 있으면 그곳에 가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모 도비아는 그가 매일 집을 비우는 것을 알고 매우 염려하여 하루는 그의 가는 곳을 물으니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근심을 하게된 백모는 이튿날 가만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문 옆의 돌집 안으로 그의 몸이 사라지므로 이곳이야말로 밀회(密會)의 장소인가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니, 예상했던 여인의 모습은 없고 다만 성모상 앞에서 열심히 베르나르디노가 홀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던 아름다운 여인이라 함은 바로 성모님이란 것을 알고 백모는 다시금 그의 경건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베르나르디노는 청년 시절에 하느님이나 성모를 이처럼 공경했을 뿐 아리나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도 출중했다.

1400년대의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인 그의 나이 17세 때, 그는 시에나에서 델 라 스칼라 병원을 운영하던 "우리의 모후’라는 형제회에 입회해 병자를 방문하며 활동하다가 혼자서는 부족해 동료 청년을 모아 생명을 내걸고 병자를 구출하는데 진력한 것도 좋은 한 예이다. 그때 동료중에는 불행히 감염되어 생명을 잃은 이도 있었으나 베르나르디노는 끝까지 무사했다. 그러나 후에 다른 큰병에 걸려 위독한 때도 있었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완쾌 되었다. 그 병환 중 그는 세속을 떠날 마음을 더 굳게 하고, 회복 후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잠시 고요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와 묵상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그의 소원은 1403년에 코롬바요 수도원에서 수도 서원을 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후 12년 동안을 독수자처럼 생활했다.

그의 성모께 대한 공경심이 얼마나 컸던가는 그의 착복식, 서원식, 또한 사제가 된 후의 첫미사를 성 마리아 탄생일에 정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디노는 서품 후 장상으로부터 설교가로 임명되어 1417년부터 밀라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학식이 풍부하고 웅변가이던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임무였으나 다만 곤란한 점은 본래 성량(聲量)이 적은 것이었다. 그러나 성모의 전구를 구하자 기이하게도 쟁쟁한 큰 목소리로 변했다고 한다.

 

그의 웅변술과 정열적이며 뛰어난 설교는 언제나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며 설교해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랐는데, 그가 특히 역설한 내용은 예수 성명(Holy Name)에 대한 신심과 시대의 악을 끊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가 도박이 죄악이란 이유를 설명하자, 사람들은 즉시 집에서 카드 같은 것을 갖고 와서 그것을 불속에 던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르디노는 그러한 사람들의 선량한 결심을 일시에만 그치지 않도록 예수의 성명에 대한 신심을 새로이 제창하고 아울러 성모와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을 장려했다. 그 외에도 ’자비의 산’이란 금융기구를 설치해 가난한 이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자선병원, 고아원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는 등 공익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

 

그의 일부 가르침은 볼로냐 대학교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는데, 이 분쟁은 거의 8년이나 계속되었다.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에 대해서는 악의를 품는 사람들이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무고해 그로 말미암아 잠시 설교를 금지 당한 적도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거나 분개하는 빛이 없이 그 시련을 참아냈다. 그 후 교황은 상세한 조사로써 베르나르디노의 무죄함을 알고 설교를 허락함은 물론, 그를 시에나 교구의 주교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울비노 주교구 관리를 위탁하려고 했으나 베르나르디노는 언제나 그 임무에 부적당한 자임을 내세우며 끝끝내 주교가 되지 않고 일평생 동안 설교가로서 만족했다.

 

그는 흔히 ’민중의 설교가, 베르나르디노’로 불리웠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코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해 프란치스코회 내에 규율 엄수의 미풍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세상 사람들의 신심을 북돋기 위한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플로렌스 공의회에 참석했고, 1444년에는 그의 마지막 순회 선교 여행을 떠났으나, 아브루찌의 아퀼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성심 성의껏 일한 베르나르디노는 중병에 걸려 사랑하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력이 다해 운명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 후 6년이 지나서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18.Canto Gregoriano-Traditor Autem-Benedictus.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시토회)-축일:8월20일.게시판59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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