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월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그레고리오 주교학자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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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1-02 ㅣ No.833

 

[이콘]대 바실리오(Basilios der Grosse)중앙러시아.1600년경.122x52cm.

 

이 성화는 희랍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단 장식용 벽화의 한 부분이었다. 러시아의 성상화에 있어서 소위 이코노스타세 (Ikonostase) 라고 불리우는 제단과 신자들 사이를 구분 짓는 이 성단 장식용 벽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벽화는 정통교회 계통이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러시아 내에서는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성장은 대 바실리오의 전신상으로서 십자가 무늬를 한 주교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그의 어깨 위에는 오모포리온 (Omophorion) 이 걸쳐있다. 그는 손에 화려하게 장정(裝幀)된 복음서를 들고 있으며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왼쪽으로 약간 숙이고 서있다 아름다고 부드러운 색조를 띤 작품이다.

 

축일 : 1월 2일

성 바실리오(대) Basilius.

St.Basil the Great 379년 주교,학자, 병원관리인의 주보 .

 

성 대 바실리오(330-379)는 부유하고 이름있는 크리스챤 가정의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끄리나(맏이), 그의 부친은 바실리오(맏이), 그의 모친은 에멜리아, 그의 큰 누이는 마끄리나, 그리고 두 동생은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체사레아, 콘스탄티노블 그리고 아테네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그 후부터 폰투스의 이리스 강 지역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서 정착하였다. 바실리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함게 생활했을 뿐인데도, 그는 성 베네딕또와는 달리 법 제정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오늘날까지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들이 이 수도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오는 365년부터 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 황제인 발렌스가 정통 크리스챤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고,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해야 하였다.

 

바실리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소와 서방 교회 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서 부자들의 탐욕을 질책했던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교파 (Arianismus)의 교도들과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시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불과 한 달만에 체사레아에서 1월 1일에 사망하였다.

 

바실리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그가 폰투스에서 재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오는 성직 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치아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도,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박학한 저서들과 4백여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학적 업적과 수많은 설교는 그를 동방의 네 분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게 했지만, 49세로 운명함으로써 세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던 것이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오 나지안조와 함께 편집한 필로깔리아가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박사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고 계시다.

 

 

 

Saint Gregoire de Nazianze 15c

 

축일 : 1월 2일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St.Gregory Nazianzen 주교,신학자, 콘스탄티노블

(330-389년390년? )

 

성 그레고리오는 성 대 바실리오가 태어난 해인 330년, 나지안젠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맏이(St.Gregory Nazianzen the Elder 374년 주교,증거자.축일 1월1일)와 성녀 논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파도치아의 나지안젠이 고향이고, 카파도치아의 체사레아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바실리오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오와 미래의 황제 율리안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도우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안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블로 초청하여 아리안계 지역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안계인 막시모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경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안계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블 공의회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389년(또는 390년) 1월 25일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체니아 공의회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박사"로 불린다.또한 학문과 웅변에서 뛰어났던 그는 ’신학자(theologu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바실리오와 함께 사도적 믿음, 그리스도의 신성 및 성령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바실리오와 더불어 동방교회의 위대한 네 분 학자 중의 한 분으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43, in laudem basilii Magni, 15.16-17, 19-21: PG 36,514-523)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가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강의 지류처럼 같은 조국의 샘으로부터 학문을 추구하고자 서로 다른 행로로 떠나갔으나, 흡사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아테네가 우리 두 사람을 상봉케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친구인 바실리오의 무게 있는 행동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를 모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권고해 주었습니다. 실은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명성을 이미 들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아테네에 처음 유학 오는 학생들이 보통 인정 받지 못하는 처지와는 달리 바실리오만은 이러한 통례를 넘어 특별한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우정의 서곡이고 상호간의 친밀성을 불붙여 준 계기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 사람은 상호간의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은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적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더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둘 다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소망으로 이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대개 학생들간에 질투심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지만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결코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경쟁은 누가 일등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상대방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면 안되지만 우리는 각자가 서로 안에 있고 또 서로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과업과 갈망은 덕을 쌓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며 현세의 삶을 떠나기 전에도 여기를 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활과 행동을 하느님의 가르침의 지도에 따라 이끌어 나가면서 동시에 덕행에 대한 사랑을 서로 분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좀 지나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서로에게 있어 선악을 식별하는 규범과 척도였습니다.

 

자기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귀족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얻은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에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콘]세명의 기독교교육자.러시아19세기.(40.5x34cm)

대바실리.나지안즈에서 온 그레고리.요한크리소스토모스.만딜리온.포차엡스카야성모

 

이 성화에서는 대부분 함께 그려지는 세 명의 기독교 교육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을 경배하는 것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하나의 통례로 되어 있다.

세 명의 총주교들은 모두 제복(祭服)을 차려입고 정면을 향해서 나란히 서있다. 그들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며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사람들은 세사레아(Casarea)의 주교였던 대 바실리외 (330-379) 학식과 맑은 정신을 숭배한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나지안즈(Nazianz)에서 온 그레고리 (Gregorios)의 빛나는 웅변술과 그의 비상한 어법을 경탄하였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자이며 총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Johannes Chrysostomos) (354-407)가 저술한 책의 아치(雅致)를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성자 위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화면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려진 무명수건(Mandylion)과 포차엡스카야 (Potchajevskaja)의 성모상을 그려 넣었다.

 

♬12.Christus Factus Est Pro Nobis-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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