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 잰 듯 정확하고 반듯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겐 답답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범생이’라는 말도 그렇게 똑 부러지는 모범적인 학생들을 풍자하는 심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 범생이들의 특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다, 또는 얄밉다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함께하기엔 뭔지 불편하다는 심기를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하신 대답을 보면 예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물론 질문자의 겸손과 걱정을 담은 물음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러 온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자신하고 있으면서 그런 질문을 던졌을 테니 ‘나(우리)는 구원받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좀 힘들겠죠?’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단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하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러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쉽진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말씀의 끝부분을 보면 분명히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말씀은 첫째와 꼴찌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구원에 가까이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이 뒤바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얄미운 너(희)’와 ‘네가 제외시키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얄미운 생각은 접고 우리도 그 사람들도 모두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힘쓰는 데 전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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