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성당 게시판

짧은 생각

인쇄

신경철 [shin765] 쪽지 캡슐

2002-08-15 ㅣ No.235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적 담화>를 읽으며

 

수도자들이 가난을 계명으로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의 유혹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물질적 결핍의 문제는 수도회 자체의 존립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말씀 만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어떤 물질적 결핍도 인간이 참아내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데라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부인에 비유하였군요.

’부자되세요’라는 광고를 들었다면 화라도 냈겠습니다.

물질적 가난을 덕행의 수단으로 삼는 일은 종교인들만의 몫은 아니 듯 합니다.

근검과 절약과 청렴을 목숨처럼 여긴 성현이 한국사에만도 숱할 것입니다.

 

이러한 발언을 할 능력은 미흡하지만,국부론이 씌여졌을 때

종교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담 스미스는 마르크스를 기다려 호된 비판을 받았던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가 붕괴했다고 마르크스의 근본정신이 무너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잉여가치를 통한 착취와 부익부 빈익빈 사회구조는 개인으로는 어쩔 수 없어

노동운동으로 저항한 것은 아닙니까?

 

성교회가 무슨 약속을 했고 안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해 온 것은 사실인 듯하고

심지어 흉악한 사형수와 감옥에 있는 죄수들과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를 돕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체제 내의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교회 내의 가난한 사람들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가난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라 믿습니다.부와 재물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함을 의식해서는 안되듯이

가난을 가난으로 의식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 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글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정신의 윗부분이니 아랫 부분이니 하는 말은 관념론인 듯합니다.

분노할 때 온유를 불러올 능력은 정신적으로 가능한 듯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으신 분은 고생을 많이 한 듯합니다.

줄을 그어 놓은 부분이 중요한 내용을 많이 놓치고 따분해 한 표가 납니다.  

스땅달의 <적과 흑>이 1960년대까지 한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요컨데,불문학에서 문학자의 수호성인이란 것이

한국에서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느님은 뒤뜰린 나무로 훌륭한 걸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뒤뜰린 나무는 자신을 불행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뒤틀린 나무가 끝가지 우리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잘려져서 불쏘시개로 밖에 씌여지지 못할 것입니다.

 



4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