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5월10일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5.Veni Sancte Spr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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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10 ㅣ No.1150

 

축일 : 5월 10일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주교 학자

S. Antoninus Pierozzi (1389-1439)

 

안토니노는 1389년 3월 1일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피에로지였는데, 허약한 체질 때문에 친숙한 별명으로서 “안토니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토니노는 ”작은 안토니오“라는 뜻이다. 그러나 안토니노의 생애는 위대한 영혼의 삶이었으며, 광대하고 조직적인 악에 대항한 덕의 승리였다.

 

안토니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계시적인 이야기 하나가 알려져 있다. 그는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의 약함을 걱정했던 계모는, 식사 때에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기를 주었다. 그런데 수도생활을 결심한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그 자기의 고기를 식탁 아래의 고양이들에게 몰래 주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려는 꿈을 키웠다.

 

그가 16살이 되던 어느 날,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라는 수도원의 대성당에서, 요한 도미니치의 설교를 듣고 커다란 감동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 위대한 설교자를 찾아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요한 도미니치는 피렌체 근처에 있는 피에솔레에서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젊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개혁 수도원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도회는 엄격한 규율 준수를 위한 수도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안토니노는 이렇게 엄격한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게 보였다. 요한 도미니치는 열망에 찬 이 젊은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그는 안토니노에게 “데크레툼; Decretum (그라씨아노 수사가 하나로 재 편찬한 교회의 법령집과 규범들)"이라는 방대하고 어려운 책을 외워 오라고 말했다. 이 책의 분량과 겉모양이 이 젊은이의 기를 꺾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안토니노는 강철같은 의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에 가서 그 책을 외우기 시작했고 해가 질 무렵에 이 불가능한 일을 마쳤다. 그리고 요한 도미니치에게 돌아와, 그가 요구했던 대로 이를 암송했다. 그가 수도복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 약한 젊은이는 1405년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를 했으며 54년 동안 훌륭한 수도자로서 살았다.

 

 

안토니노는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치고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살며,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 명성 높은 교회법의 학자이자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서 신중함과 결단력 높은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폴리뇨, 피에솔레, 나폴리, 카르토나, 로마, 피렌체, 등의 도미니칸 수도원들의 원장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특히 1436년부터 1444년까지 피렌체의 성 마르코 첫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와 격려로 성 마르코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오랜 동료인 프라 안젤리코와 세밀 화가였던 프라 베네데토에 의해 프레스코화와 성가 책들이 그 수도회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첫 공식적인 공공도서관을 열었다. 그리고 안토니노는 1437-1447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설교자회 수도원들의 대리구장이 되었다.

 

그는 1439년에 피렌체의 공의회에 신학자로서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관한 성 마르코 수도원의 공사를 마칠 때인 1441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 친구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직접 수도원의 성당을 축성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죽음에 임박하자 절친한 친구인 안토니노를 부를 만큼 안토니노를 존경하고 있었다. 겸손한 안토니노는 교회 고위 성직자를 원하지 않았지만, 교황은 그의 거룩함과 유식함, 그리고 신중함을 잘 알았기에 1446년 3월 13일에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임명이 기도와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를 원하는 겸손한 학자에게는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였지만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축복이었으며, 그들은 행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로서의 안토니노는 피렌체 공화국 지도자들, 특히 메디치의 코시모와 에우제니노 4세, 니콜라오 5세와 비오 2세 교황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평화의 대사로서 일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13년 동안 피렌체의 대교구를 개혁시키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끊임없는 기도속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지혜의 은사를 받은 안토니노는 다른 사람들을 조언과 상담으로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었으니 “조언의 안토니노”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윤리 신학집(Summa Theologia Moralis)”을 비롯하여 훌륭한 많은 책들을 썼는데, 이들 모두는 실용적인 내용으로 윤리신학에 대한 것과, 고해신부를 위한 지침, 세계사의 연대기(Chronicon),등 그 밖의 여러 실용적인 주제들을 다룬 것들이다.

 

 

 

 

안토니노는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친절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때 부유한 도시 피렌체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줌으로서, 살림을 담당했던 이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그 도시의 가난한 이들과 직접 만났고, 특히 부유하다가 파산하여 구걸하게 된 이들도 만났다. 오늘날의 빈첸시오회처럼 남모르게 자선 사업을 하는 것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성 마르띠노의 선인들”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특히 흑사병이 피렌체에 퍼졌을 때, 그는 모금활동과 병자 돌보는 일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59년 5월 2일에 안토니노는 성 마르코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온 도시의 탄식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교황 비오 2세가 그의 장례식을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8일 후에 장례식을 주례했다. 지금까지 그는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의 시체가 썩지 않고 남아있다. “다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이 말은 그의 온 생애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1523년 5월 31일에 교황 아드리아노 6세에 의해서 시성 되었고 축일은 5월 10일이다.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는 훌륭한 도미니칸의 수도자이며 사제, 그리고 모범적인 주교였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었으며, 성 도미니코를 본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충실하게 복음적 권고를 지켰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였으며, 특히 성체성사와 성모 마리아에게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다. 그리고 겸손하고 엄격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좋은 설교가와 교리학자이었으며, 당시의 종교적인 타락을 막고,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지혜의 은사를 가지고 성령의 빛으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여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성 도미니코(축일:8월8일.게시판590번)

 

★도미니코 수도회(도미니코회, 道明會) 또는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

수도회의 모토는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입니다.-도미니코 수도회 홈에서

 

 

♬5.Canto Gregoriano-Veni Sancte Spr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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