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성소주일]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며♬두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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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10 ㅣ No.1154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며 -곽명호 신부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

 

 

 

첫번째 만남

 

신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나는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다. 그런데 그때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들은 나를 비롯하여 모두 다 응큼한 사람들이었다. 한결같이 성소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먼저 성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말이라도 나올라치면 모두들 화들짝 놀란 듯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 응큼스러움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를 모르지 않았고, 오히려 확신마저 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사들은 매일 새벽미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날 부터인가 낯모르는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리와 함께 주일학교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응큼스러운 성소의 꿈에 대한 시치미가 오히려 한 수 위였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교사들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는데, 어느날은 모처럼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모두들 시내 외출에는 쑥맥인지라 모두 함께 아는 커피숍이 없어 어디에서 만날지에 대해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어느 종합병원 이름을 대며 거기는 다 알고 있으니 그 병원 대합실에서 만나자고 제의 했다. 모두들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재치와 엉뚱함에 폭소를 터뜨렸다. 종합병원 대합실은 얼굴표정이 밝은 사람을 찾기 힘든 우울한 곳이다. 쏙닥거리고 키득거리며 병원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기가 참 머쓱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아무것도 안 시키고 앉아 있으려니 좀 미안하죠?" 했더니,

그는 대뜸 "그럼 아스피린 한 접시하고 페니실린 주사약 두잔 시킬까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맑고 장난기 어린 얼굴과 쾌청한 웃음 그리고 재치있는 유머 감각은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해 여름 우리 교사들은 어느 한적한 섬으로 연수를 갔었다. 민박집 우물가에서 새 옷으로 갈아 입고 나오는 그에게 한 양동이 그득 머리에 물을 부으며,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능청을 떨며 세례 갱신식을 했다. 응당 그 쾌청한 웃음소리와 함께 치열한 물싸움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경건한 모습과 표정으로 받아 들일 뿐 아니라, 오히려 평화롭고 기쁜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골리앗 손바닥보다도 더 큰 플라타나스 이파리가 뒹굴던 가을에 나는 보고싶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해 겨울이 끝날무렵 나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두 번째 만남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신학생이 되고 나서 첫 여름방학을 맞아 주일학교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보여야 할 사람들이 몇몇 보이지 않았다. 모두 수도원으로 입회를 했단다. 모두들 그러려니 했지만 가장 놀라움을 주었던 것은 그가 갈멜 봉쇄 수녀원에 입회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약사 연수를 한달간 다녀온다던 그가 수녀원에 입회하여 교사들조차 한동안 소식을 몰랐다는 것이다. 카톨릭 신자가 하나도 없었던 그의 집에서도 그를 찾느라 한바탕 큰 난리를 치루었단다.

 

면회를 갔었다….

쇠창살이 가운데 놓인 면회실에 앉아 있으니 미닫이 문짝이 하나씩 열리면서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어이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햐얀 와이셔츠의 신학생으로, 그는 검은 수도복의 갈멜 수녀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녀님이 먼저 말을 했다.

"학사님! 세례 갱신식 생각나세요? 그때 하느님이 학사님을 통해 무슨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저는 알았답니다."

둔탁한 나무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묻는 듯 마는 듯 선문답을 하듯 이렇게 말했다.

 

"가운데 쇠창살이 있는 것을 보니 분명 둘 중 하나는 갇혀 있는 것인데, 누가 갇힌 것입니까?" 그랬더니 수녀님은 주저없이 이렇게 답하셨다.

"저는 한번도 갇혀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으니, 갇혀 있다면 학사님이 갇혀 있을 거예요…."

나는 오래도록 수녀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했다.

 

 

 

 

세 번째 만남

 

그후 여섯해가 지나고 나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나는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모든 수녀님들을 찾아가 미사를 드렸는데, 그중 갈멜 수녀원을 제일 먼저 찾았다. 나는 그곳 갈멜수녀원 강론때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신 어떤 수녀님께 신학생 시절에 면회를 와서 ’면회실 가운데 창살이 있으니 누가 갇힌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수녀님은 당신은 한번도 갇혔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으니 학사님이 갇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수녀님의 말씀은 옳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욕심, 이기심, 교만함, 미움, 편견, 아집의 창살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제 저도 수녀님들과 같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절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수녀님은 여전히 맑고 투명한 얼굴에 쾌청한 웃음으로 나의 사제서품을 축하해 주셨다.

 

 

 

 

네 번째 만남

 

간밤의 비바람으로 노란 은행잎이 흐드러지게 쏟아져 내리던 늦은 가을날, 수녀님으로부터 종신서원을 한다는 조그맣고 초라한 카드 한 장을 받았다.

종신서원을 하시던 날에는 겨울비에 싸락눈까지 내려 한기가 스멀스멀 몸속을 파고 들던 날이었다.

특이한 갈멜 수녀원의 복장과 철창을 사이에 두고 하는 서원식은 묘한 느낌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 위에 낮게, 아주 낮게 엎드려 있는 수녀님… 조금은 파리한 듯 하면서도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 그리고 꾸밈없이 맑은 성가소리….

분명 그것이 아닌데도 어디선가 삶의 서러움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듯한, 세상과는 아주 먼 곳처럼 다가왔다.

맑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얼굴… 평화롭고 잔잔한 미소… 나즈막하고 편안한 목소리…. 이곳엔 세월이 멈춰버린 듯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찌든 얼굴에 꼬깃꼬깃 세속의 때가 묻은 것 같은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저와 함께 활동했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수녀님 맞죠?" 수녀님은 잔잔한 미소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하셨다.

 

비둘기호 기차는 화물칸 세칸에 객실 두칸을 달았는데 덜컹거리는 문짝과 좌석도 옛날 시골 버스모양 빙둘러 앉아야 하는 기차였다.

시종일관 비몽사몽인 아저씨, 피곤에 찌든 듯 간신히 눈을 치켜뜨는 어느 시골 아낙, 시장 바구니 안에서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토종닭 한 마리,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애써 잠바 깃을 세워 막아보려는 어느 떠꺼머리 총각….

비둘기호 기차는 삶의 한 복판을 지나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길을 덜그럭 거리며 잘도 잘도 달렸다.

 

 

 

 

다섯 번째 만남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장마가 시작되던 유월 어느날 수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일 장례미사가 있단다. 오년만에 다시 수녀원을 찾았다.

종신서원식 때 꽃장식 십자가 위에 나즈막히 엎드려 계셨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수녀님 죄송합니다. 이 동기생이 너무나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 이제야 진정한 자유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수녀님!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수녀님과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는데요…" 라고 중얼거렸지만,

수녀님의 답변은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미사를 집전하신 신부님은 "여러분 이 젊은 수녀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수녀님은 바로 오늘이 천상탄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강론을 하셨다.

 

 

 

 

유월의 장마비가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금새 붉은 황톳물을 쏟아내며 사방공사 중인 성당 옹벽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것만 같다.

대충 우비를 꿰어 입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삽을 찾아들고 내려가 보았지만 속수무책이다.

 

"그~래 내려라….

비만 오면 무덤가 청개구리처럼 울어댄 적이 어디 한두번이냐?"

이렇게 푸념을 하면서도 어쩐지 시원스레 쏟아지는 비가 싫지 않은 것은 왠일일까?

핑계김에 비나 실컷 맞아보자. 거적대기 같은 거 다 쓸려 나가도록 비나 실컷 맞아보자.

 

 

성녀 소화 데레사(축일:10월1일 게시판673번)

 

 

♬두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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