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 꼴찌를 위하여(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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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길 [fcan] 쪽지 캡슐

2004-10-27 ㅣ No.3705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2004-10-27)

독서 : 에페 6,1-9 복음 : 루가 13,22-30

*  꼴찌를 위하여 *

그때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동네와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루가 13,22­-30)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반듯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겐 답답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범생이’라는 말도 그렇게 똑 부러지는 모범적인 학생들을 풍자하는 심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 범생이들의 특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다, 또는 얄밉다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함께하기엔 뭔지 불편하다는 심기를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하신 대답을 보면 예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물론 질문자의 겸손과 걱정을 담은 물음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러 온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자신하고 있으면서 그런 질문을 던졌을 테니 ‘나(우리)는 구원받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좀 힘들겠죠?’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단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하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러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쉽진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말씀의 끝부분을 보면 분명히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말씀은 첫째와 꼴찌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구원에 가까이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이 뒤바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얄미운 너(희)’와 ‘네가 제외시키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얄미운 생각은 접고 우리도 그 사람들도 모두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힘쓰는 데 전력해야겠습니다.

이정석 신부(전주 가톨릭신학원)

-   세월 -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 류시화의 詩중에서 -


님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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