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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배낭여행-19] 대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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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대 [changjhon] 쪽지 캡슐

1999-12-23 ㅣ No.1130

◎세계인과 대화하는 배낭여행 - 19회 {대만-5}

 

  

         -동양의 그랜드캐년 태루각에서의 모험-

 

 

화련에서 천상까지의 거리는 45km이다. 그 중간 지점인 동서횡관공로

와 천상 사이의 20km가 바로 신의 작품이라 일컫는 동양의 그랜드캐년 타이루커 대협곡이다. 고생대(古生代)의 대리석 단애(斷崖)가 그 높이만도 수백 메타에 이르는 곳이다. 영겁(永劫)의 세월과 함께 한 신비의 대리석 계곡 절벽은 오늘도 여전히 아침 햇살을 듬뿍 머금은 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6:30분에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둘러

메고 나섰다. 타이완 최대의 비경(秘境), 신비의 협곡을 충분히 감상하기 위해 나는 버스에 몸을 맡기는 대신에 시간에 구애받음 없이 그 20km의 구간을 걷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계곡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연의 웅대함이 활짝 펼쳐진다. ’과연 신의 작품은 위대하구나,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후좌우 고저 어느 한쪽도 눈길을 쉽게 뗄 수가 없다. 앞을 보면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마치 신(神)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고, 뒤를 돌아보면 자연과 일치된 순수무구(純粹無垢)한 어느 노승(老僧)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왼쪽을 보면 거대한 대리석 암반(巖盤)이 마치 투명한 거울을 세워 놓은 듯 하다. 오른쪽을 보면 상하(常夏)의 나라답게 녹엽(綠葉)이 우거졌다. 고개 들어 위를 보면 협곡 사이의 한줄기 창공(蒼空)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청룡(靑龍)이 비상(飛上)하는 듯 하고, 고개 숙여 까마득한 협곡의 바닥을 보면 뽀얀 빛의 물줄기가 마치 생명의 원천인 엄마의 젖줄과도 같다.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은 인간을 보호한다지... .

 

또 다른 경이로운 현상은 그들이 해낸 기적의 도로 건설이다. 이 지역 전체가 견고한 대리석으로 이뤄진 곳인데, 특히 대리석 절벽 산을 ㄷ자 형식으로 도로를 파 놓은 것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결과이다.

 

옛날엔 어차피 각종 토목 공사를 할 때  원시적 공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인부들은 절벽의 로프에 매달린 채 정과 망치로 쪼아 가며 그 엄청난 도로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초인적 인내와 희생없인 불가능했다. 어떤 구역의 터널은 그 내부에서 자동차가 교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 터널 가운데 서 있으면 마치 금방이라도 ’꿍’ 내려앉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그 중압감을 더해 준다. 이것은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다.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예술적 감각과 정신 그리고 인내의 결실이리라. 그러나 신의 작품을 해손(害損)한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212명의 영령을 달래는 추모비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세상 만사에 거저란 없는 법이니까.

 

이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들도 다양했다. 승용차, 관광버스 그리고 일반 버스 등이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관광객들은 배낭 메고 홀로 걷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 준다. 편안하게 관광하는 저 사람들은 굳이 무거운 배낭을 둘러매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간혹 나처럼 걷는 이도 있음직 한데, 오늘 따라 아무리 걸어도 나홀로 뿐이네, 다들 바쁜 사람들인가 보다.

 

약 5km 쯤 걸었을까, 이상하게 차량 소통이 뚝 끊기는 것이었다. 적막함마저 느낄 때다. 한 대의 지프차가 내 앞으로 달려온다. 차를 잠시 멈추더니 나보고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되돌아가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전방 어느 지점에서 낙석(落石)사고가 발생하여 도로가 막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전 연락을 받은 차량들이 운행을 중단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계속 앞으로 갔다.

 

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실 옛날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중소형 낙석 사고를 종종 본 적도 있고 99년 5월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을 갈 땐 더 끔찍한 낙반 -land slide- 사고를 격은 바도 있다. 어쨌든 나는 당시에 도로가 봉쇄될 정도의 엄청난 바위 덩어리가 떨어졌다니,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두 번째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 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원 봉사자인 듯한 남자 두 명이 나를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저지했다. 나는 그들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보이며 리포터라고 했다.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더 이상 제지하지 않았다. 약 30m 거리에서 봐도 길을 막고 있는 바위 덩이의 크기는 집채만했다. 사방이 협곡인지라 지금 어느 쪽에서 돌덩이가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그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지점에 다다르니 아직 먼지가 주위를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조그만 돌덩이들이 간헐적으로 여기저기 ’툭툭’ 떨어진다. 어쩌다 잔 돌 부서르기 파편이라도 맞으면 끝장이다. 그러나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색다른 모험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이니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나는 조심스레 움직였다. 마치 대형 건물이 무너져 내린 곳에 그 구조물로 뒤엉켜 있는 틈바구니에 끼여들듯이, 집채만한 바위들로 겹쳐 있는 그 공간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 순간부터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여전히 ’툭툭’ 돌 떨어지는 소리는 죽음을 재촉하는 전주곡과 같았다. 실제로 죽음을 각오했었다. 나의 무모한 모험심이 후퇴를 용납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편 내 입에선 어느새 ’오, 주여...도와 주소서...’를 외치고 있었다.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Divine Savior, I ask that you bless me... you save me...

 

나는 드디어 빠져 나왔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몽유병 환자의 모습으로 기어 나왔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도 전에 내 귓전엔 중국말 일본말로 뒤섞인 음성들이 들렸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정차한 관광 버스들, 이곳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마치 늠름한 개선 장군(凱旋將軍)을 환영한 듯 했다. 설마 초죽음이 되어 기어 나오는 개선 장군이 있으랴 만은. 어쨌든 나도 그들에게 답례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카메라로 그 악몽의 현장을 찍어 댔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나의 역사의 장이요 추억의 장(場)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짧지 않았던 10여 분 동안, 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실존의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별천지)에서 기지사경(幾至死境-거의 죽음)을 동시에 오간 것이다.

 

그 악몽의 물리적 거리는 불과 20여 메타, 그러나 공포의 심리적 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이었다. 군 생활을 통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본 것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이야...  

 

그리고 잠시 후 대형 중장비 크레인과 불도저가 도착했다. 나는 그들의 신속한 사고 처리반 투입 현장을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태루각 입구에서 이곳 원주민 의상을 입은 아미족 원주민 여인들과 기념 사진도 찍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밝다. 그들은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보통 US $ 1.00이 주어진다. 돈, 돈, 돈, 정말 그들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일까? 어떤 이들은 그들을 돈*>똔*>떼~*들이라고 비아냥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부가 가치가 높은 관광 상품을 꾸준히 개발 발전시키는데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음을 간과(看過)해선 안 된다.

 

나는 화련역에 도착하여 오후 4시 발 타이페이 행 열차를 탔다. 자강호인데 입석표(370元)밖에 없었다. 자강호라면 우리의 새마을 열차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입석이 허용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의아했는데 아마 그들의 실용주의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닐까 싶었다. 정말 흥미로운 광경은 기차가 달리는 가운데 계속됐다. 역을 지남에 따라 승객들의 수는 엄청 불어났다. 문자 그대로 입추여지(立錐餘地)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누구도 기차가 혼잡하다 하여 불평 불만이나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완전 도떼기시장인데도 말이다. 이 같은 현상을 보면서 나는 화교들의 의식구조와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토에서 쫓겨 나온 대부분의 화교들 신분은 대개가 일종의 천민 계층으로 농민, 상인 그리고 노동자 출신들이다. 그들에겐 동병상린(同病相隣)의 상호 공감대가 저변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에겐 적수공권(赤手空拳-빈손과 맨주먹)으로 백수기가(白手起家-무일푼으로 성공)하기 까지 각고절검(刻苦節儉-몹씨 애써고 절약검소)한 정신이 있었다. 오늘날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어 생활화 된 것이다.

 

그들에겐 명분보다 실리를 쫓는 실용주의 사상도 철저하다. 그러나 그들에겐 대전제 조건이 있다. 공생공존(共生共存)의 불문율이다. 즉, 양보, 타협 그리고 화합의 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그들이  누리는 경제 대국으로서의 세계적 평판과 인지도 그리고 그 영향력은 거저 우연히 얻은 행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감사합니다.        <대만편-6, 계속>       - 장 정 대 -

 

▶E-mail: jackchang7@yahoo.co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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