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순명으로 부터 얻어지는 자유-By:Thomas Merton♬Kyrie(빈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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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1-06 ㅣ No.839

순명으로 부터 얻어지는 자유- By: Thomas Merton

("Freedom Under Obedience")

Source:"New Seeds of Contemplation"  

이 세상에 혼자서 성화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절대 고립속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 사람들의 약함과 결함을 이해하고 자신을 그 속에서 잃어 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진정한 관상가가 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속에 깊이 새겨진 거칠고, 경직되고, 냉혹한 이기주의를 없애버리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이기주의는 하느님의 빛이 우리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절대 고립속에서 용기있게 내적인 단련을 받아 들인다 하더라도, 그 단련의 결과는, 겸손과 인내로 남을 사랑하면서, 그들의 가장 비합리적인 필요와 요구에 공감함으로써 우리 내에 성취되는 성화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 은둔자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기이한 생활안에서 그대로 말라버려서 고형화가 될 위험이 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없음으로 해서 운둔자들은, 순수한 사랑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영적인 현실을 잊어 버리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담을 쌓고,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흥미롭게 하는 기도와 책과 묵상으로 당신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이 성화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활동과 일들을, 당신 자신에게는 지루하고 당신의 내적인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거부하는 것이 관상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하느님을 발견하는 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취향, 욕구, 야심과 충족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심미적인 즐거움 속에 누에고치같이 당신자신을 가두어 버리는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분이 당신안에 사실 수 있겠는가?  

내적인 관상과 외적이 활동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 가지 다른 면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관상가의 외적인 활동은, 그의 내적 관상에서 연유되어야 하며, 그 모습이 같아야 한다. 그가 관상외의 하는 것들은, 모두가 그의 고요하지만 빛을 발하는 내적 생활을 반영 하여야 한다. 결국, 외적인 활동에서 그가 관상에서 찾는 같은 것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속에서 하느님에게서 배운 것이 아무리 작다 하다라도 그것을 활동에 반영해야 한다. 기도 속에서 얻은 그 만큼이 활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당신의 활동이 관상속에서 얻은 내적 비움과 침묵 그리고 초연한 상태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 관상과 활동의 비밀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맡기며, 당신의 의지에 달린 모든 일들에 하느님에게 완전하게 순명하는데에 있다. 당신의 내적 생활과 외적인 활동 모두에서 당신이 원해야 하는 것은 다 하나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당신이 이런 활동을 하면, 기도 속에서 발견한 무심한 평화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며, 당신이 하는 단순한 일들 속에서 사람들은 평화로움을 발견하여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된다.

결국, 침묵과 무의식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관상가들이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그들의 일상 행동들 ? 걷는 것, 서 있는 것, 앉는 것, 물건을 집는 것 그리고 물건을 손에 들고 있는 것 ? 을 통하여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점점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성인들은 자신들의 하는 일들에 대한 의식을 멈추게 되며, 점차로 하느님이 그들안에서 그들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본성이 되버리면서, 그들이 하는 일들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내적이 자유와 순수한 사랑을 찾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면서,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며, 성령은 그들에게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원하는 마음을 준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판단과 지도에 순명하는 것이다. 

관상속에서 하느님에게 이끌어진 영은 곧 순명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 그 영은 매일 자신의 이기심과, 서툴음, 무능함과 자부심이라는 짐에서 오는 어려움과 고뇌를 겪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로 부터 지도를 받고 이끌림을 받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 자신의 의지가 엄청난 절망과 어둠의 원천이 되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달라거나, 지혜나 지도를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순명자체에 대한 욕구와, 그 자신의 의지와 등불을 포기하려고 하려는 열망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영적 지도자에게 순명하는 것은 그 지도자의 명령이나 충고가 그의 눈에 좋아 보이거나, 이익이 되어 보이거나, 지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지도자가 경탄할 만한 결정을 내려서 순명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떄는 지도자의 결정이 현명해 보이진 않지만, 그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지도자를 하느님과 자신사이의 중재자로 받아 들였고, 자신의 상황에서 그 에게 지도자로 주어진 사람의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지도를 받지 않는 관상가이다. 그는 그 자신이 보는 것만 신뢰한다. 그는 그 자신의 내적이 목소리에만 귀를 귀울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거창하고 안락하고, 달콤한 기분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분이 달콤하면 할 수록, 안락하면 할 수록 그는 자신의 무류성을 확신한다. 이 사람이 자기 확신의 확실한 힘으로 다른 사람과이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정말 성인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이 사람은 도시 전체 또는 어떤 종교 단체 더 나아가서는 나라 전체를 파괴 할 수 있다. 세계는 이런 몽상가들이 남긴 상처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이런 사람들은 해로움은 주지 않지만, 지루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영적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고 있으면서, 자가 자신의 둥지를 만들어 안락하게 들어 앉아 있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그 곳에서 빼낼 수 없으며, 아무도 그를 부러워하거나 숭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인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신이 만들어 논 가짜에 자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만 그 행복은 아무 감동도 주지 않으며, 남에게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는 껍데기 이며 불안정하다. 그들은 할말이 많으며, 그들이 하는 말은 항상 “나”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에 의한 희생보다는 쾌락과 감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침체되어 있다. 진정한 관상의 불꽃은 꺼져 버린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에 의해, 참 관상이 발견되는 어둠으로 인도 된다면, 당신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달콤함에 머울러 있을 수가 없다. 가짜 만족과 충족 그리고 자기 자신의 판단에 대한 절대 확신이 당신을 전적으로 속일 수는 없다. 이 가짜 만족과 확신은 당신을 조금 아프게 하고,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영적인 구역질 때문에, 당신자신을 열어서 독소를 내 보내야 한다. 

이 영적인 순명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고집과 진정한 자유의 차이를 주의깊게 구별하여햐 한다. 이 차이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명하면서 자유를 얻도록 불림을 받은 것이지, 기계같은 권위에 반응하기 위해서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하느님에게 순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자유의 상실은 무의식적으로 독재적인 지도자에 지배 당함으로써 오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자동반응은 자신의 변덕스러운 고집에서 오거나 또는 독재적인 힘에 눌리거나 관행과 정해진 순서를 그대로 따르거나 또는 단지 집단적인 관성에서 올 수도 있다. 

가장 흔한 착각중의 하나는 나의 불안정한 판단으로 영적 권위에 대항하는 것을 나 자신의 자유를 행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자유 의지하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니며 순수한 자유로 이끌지 못한다. 이것은 자유라기 보다는 허가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런 자유의지의 행사가 수동적으로 관행을 따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러나 자유의지라는 미명하에 이런 행동의 한계를 볼 수 없어서는 않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순명을 이해하는 데에 대단한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과 자유의지를 희생하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문제는 종종 몹시 혼동을 가져 오기도 한다. 한 면으로는 순명이 우리들에게 책임회피를 유발할 수 도 있다. 다른 한 면으로는 지도자가 자신의 책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변덕과 미성숙한 판단에 끌려 다닐 수 도 있다.  

지적으로 순명을 하는 것을 배운 사람만이 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순명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지 하게 된다. 지도자의 현명함과 그 자리의 책임을 맡는 능력이 매우 중요함을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 우리는 지도자가 능력이 있건 없건 있는 그대로 순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를 받는 사람은 지도자의 상황이 이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자발적이 순명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결함을 감싸주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우리의 상식은 지도자의 결정을 분석하고 비난하는 것을 어느정도는 주저하게 가르친다. 

결국은 아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집과 편견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결함을 볼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진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지 않으면서, 비록 지도자의 명령이 불완전하고 때로는 비 합리적이고 현명하지 못해도, 지도자에게 순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궁국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모든 결함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순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종 아주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순명이라는 개념에 무작정 자신을 맡긴다고 해서 성인이나 관상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에게나 지도를 받는 사람에게나, 순명은 신중한 분별이 동반 되어야 하면, 이 분별은 바로 책임을 의미한다. 순명은 자유의 포기가 아니며, 어떤 잘 정의된 조건내에서 자유을 현명하게 사용함을 의미한다. 

이 개념이 순명을 쉽게 만들어 주지 않으며, 결코 영적 권위에서 벗어나게 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이런 종류의 순명은, 순명하기 어려운 명령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여러운 결정을 통해서 충실하게 때로는 영웅적으로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성숙된 마음을 의미한다. 이런 순명은 깊고 성숙된 영적인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성모영보- 베아토 안젤리코.1438년∼50년.190×164㎝.산 마르코 수도원. 

이 성화는 2층 복도에 그려져 수도자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 갈 때마다 수도자들의 구도생활에 평화를 주고 구세주 탄생으로 인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보여 주는 묵상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안젤리코는 하느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와 분심 없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 앞에 내려와서 구세주 예수 잉태를 예언하고 있다. 천주의 모친이 되실 여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의 모습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여인에게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라고 무릎을 꿇은 채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전형적인 동정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이고 마리아의 얼굴은 한없이 청순하고 성스러워서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왼쪽에는 이 신비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수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3세기 초에 살았던 성 베드로 순교자로서 성 도미니코로부터 직접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며 지낸 수도자의 모범이 된 이 성인을 이 신비에 동참시킨 것이라고 한다. 안젤리코가 그린 성모영보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종교적 의미 전달에 충실하여 엄격한 신앙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베아토 안젤리코는 15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화가로 성모영보를 즐겨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영보’ 이다. 이 곳은 현재 안젤리코 미술관으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이었다. 1436년 코시모 데메디치는 미켈로초라는 건축가를 시켜 이 곳을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개조했다. 그리고는 안젤리코를 초빙하여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수도원 전체에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림의 무대는 우아한 기둥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다. 

 

♬Kyrie(빈소년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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