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월7일 성 라이문도(페냐포르트)사제축일♬Agnus-Dei(빈소년합창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1-06 ㅣ No.843

축일 : 1월 7일

성 라이문도 사제 (1175?-1275년)

S. Raymundus de Penyafort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페냐포르트에서 1175년경 태어난 라이문도는 대학교수로서 재직한 밀라노에서 법률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바르셀로나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이 되고, 1222년에 도미니칸이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바르셀로나와 볼로냐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또 설교한 경험이 풍부하였다.

 

1230년, 그는 로마로 초빙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교황청의 회의와 칙서 등을 소장하는 업무를 맡았다.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명에 따라 교회 법령집을 편찬했다.또한 그는 유명한 고해신부이자 위대한 교회법규 학자로서 로마에서 교황의 고해 상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 중 고해성사를 올바로 집행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례전집(Summa casuum)은 가장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236년, 스페인으로 돌아 온 라이문도는 2년 동안 총장직(3대총장)을 역임한 뒤, 모슬렘과 유대인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였다.

 

이 즈음에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격려하여 이교도 대전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 (Summa Contra Gentiles)를 쓰게 하였으며, 아라비아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성 토마스아퀴나스 축일:1월28일 게시판917번*

*성 베드로놀라스코 축일:1월28일 게시판919번*

 

또한 그는 성 베드로 놀라스꼬와 함께 모슬렘 교도들의 포로로 전락한 그리스도 교도들을 구출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메르체다 성모마리아회"의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27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0살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성 라이문도 페냐포르트는 1601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서 시성된다.

 

메르체데의 성모마리아(축일:9월24일.게시판654번)

 

도미니코수도회(천주교 설교자회)에서 www.opkorea.org

 

1. 생애

성 라이문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처의 베냐디스의 빌라프란카에서 1175년에 출생하였고 1275년에 바르셀로나에서 귀천하였다

 

성 라이문도가 태어날 당시 신심이 깊은 가톨릭 가정에서는 그들의 자녀중 한사람 혹은 그 이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었고 성 라이문도도 이런 가톨릭 가문의 전통에 영향을 받아 어릴때부터 자비심과 참다운 지식을 배웠고 이 세상의 쾌락과 허무를 물리치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천상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는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1196년 당시 스무살 때부터 교양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204년에는 바르셀로나 주교에게 제출되어진 어떠한 법률적 사례를 조정함으로써 그의 교회법에 대한 소질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볼료냐 대학과 파리대학은 당시 크리스찬 세계의 학생들에게 꽤 매력적이었으며, 성 라이문도는 이러한 매력과 함께 더욱 고차원적인 학문세계로 이끌려서 1210년에 스페인을 떠나 볼료냐 대학으로 갔다. 그때 성 라이문도의 나이는 35세였으며 그 시대에는 그와 비슷한 나이로(나이가 들어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 법률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가르치기 시작하 였다.

 

볼로냐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강의는 무료로 이루어졌다. 그 의 거기서(볼로냐) 그는 3년동안 교회법을 가르쳤으며 지금도 바티칸에는 이때에 발표한 그의 교회법률에 관한 논문이 소장되어있다.

 

그당시 베랑게라는 바르셀로나 주교가 로마를 순례하는 도중 볼료냐에 들리게 되어 그 당시에 새롭게 설립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설교자회 (도미니코 수도회) 형제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 관할 교구에 설교자회를 설립하기를 원했으며[나중에 바르셀로나에 땅을 주어 성녀 카타리나 순교자라는 수도원를 짓게 하였음], 이와 동시에 성 라이문도의 명성을 듣고(당시 그는 도미니칸이 아니었음)그에게 귀국할 것을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데리고 가서 자기의 주교좌 대성당의 성직자로, 나중에는 부주교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성 라이문도는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고 보다 거룩하고 완전하게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봉헌하기 원했다.

 

한편 볼로냐에서와 바르셀로나에서의 도미니칸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그가 볼로냐에서 가르치는 동안에 도미니칸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도미니칸) 참신한 생활은 성 라이문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성 도미니코와 성 라이문도가 만났다는 명확한 증거자료는 없지만 바르셀로나 주교가 성 라이문도를 귀국시킬려고 설득할 당시 성 도미니코로부터 그의 몇몇 제자를 주선받았다는 점에서 이 두 성인이 만났을 것이라는 것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위에서 말한대로 보다 거룩한 생활을 원하는 성 라이문도 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다 철저히 따르기를 간절히 원했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자기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봉헌하기를 갈망하였다.

 

이러한 그의 갈망으로 인하여 1222년에 성 라이문도는 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가 47세였다. 이무렵 그는 16세기에서 17세기를 걸쳐서 판을 거듭했으며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진 고해신부 위한 지도서로써 Summa of Saint Raymond를 저술했다.

 

또한 그당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등 남 유럽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빈번히 침약해온 마호메트 교도인 사라센인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지방의 촌 부락에서 약탈을 마음대로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노예로 끌고가서, 감옥에도 가두고 고역도 시키고 말할수 없이 학대를 하며 몸의 대금을 내고 속량해 오지 않으면 영원히 포로된 사람을 석방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염려한 베드로 노라스고라는 성인은 자비의 성모 수도회라는 수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성 라이문도는 이 수도회의 회칙을 기초하여 자비의 성모 수도회의 창립자의 한사람으로 찬양받고 있다. 1255년에는 바르셀로나와 튜니지에 유대인과 무어인의 개종을 위하여 아랍어와 히브리어 학교를 세웠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로마로 불러서 그의 비서인 동시에 고해신부가 되게 하였다. 그는 법률에 관하여 매우 조애가 깊었기 때문에 교황은 그를 교회법을 다시 정리하고 편찬 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수세기 동안 증폭되어온 법령을 다시 쓰고 요약했다. 교황은 그 공로로 그를 스페인, 다라고나시의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였을 때, 세상의 명예를 원치않는 그는 그 영전을 사양함으로 교황도 그의 겸손에 감복되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나 홀로 조용히 있을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1238년에 그는 설교자회 제 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총장 임기동안(1238-1240) 도미니칸 회칙을 개정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es)를 쓰게 된것도 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성 라이문도 뻬냐포르트는 1601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서 시성된다. 축일은 1월 7일이다.

 

2. 사상

성 라이문도는 신학자, 교회법학자로써 교회법을 정리, 개정함으써로 성 교회와 설교자회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1230년 교황 그레고리오에게 소환되어 교회법전을 편찬 ,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의 제 5권 에 해당된다. 도미니칸으로써 그는 회헌을 가다듬고 손질하여 도미니칸의 근본 이념의 뼈대를 세웠다. 또한 그는 학식뿐만 아니라 실천하는데에도 남다른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가 스페인 국왕의 고백신부로 있을 때 왕이 어떤 부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을 눈치챈 그는 왕에게 잘못된 점을 솔직히 충고하다가 섬으로 귀향을 간 적도 있었다. 다시말해서 그는 아는것과 실행하 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됨 없이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할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도미니칸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설교’라는 대전제에 충실한 삶을 산 도미니칸이 었고 항상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으로 다가 갔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수 있을 까?’ 하는 생각으로 기도와 성찰을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모든 도미 니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사랑과 열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 라이문도 사제의 편지에서

(Monumenta Ord. Praed. Hist. 6,2, Romae 1901, pp. 84-85)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진리의 전파자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 말을 할 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모르거나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일반적 법칙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가면 안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채찍이 그들을 위협하지 않을 때 그들의 집은 평화롭고 고요하며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족하게 세월을 보내지만 결국에 가서는 지옥으로 곧장 떨어지고 맙니다.

 

한편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순수성과 경건함은 정화되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고 또 그 시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칼로써 두 배 세 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위협당한다 하더라도 그 위협을 완전한 기쁨과 사랑의 표시로 여겨야 합니다.

 

이 칼은 쌍날칼로서 한쪽 날은 외부 세계의 위협이라는 날이고 또 다른 쪽의 날은 내부 세계의 두려움이라는 날로 되어 있습니다. 내부 세계의 두려움이라는 날은 악령이 깊숙한 마음을 사기와 매혹으로 뒤흔들 때 두 배 세 배의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공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내적 평화와 안전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위협이라는 날은 영적인 영역에 대해 교회의 사람들이 아무 까닭 없이 박해를 일으킬 때 두배 세 배의 힘을 갖게 됩니다. 실은 친구들이 입히는 상처가 언제나 가장 중한 상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용맹한 안드레아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복되고도 바랄 만한 십자가입니다. 또 뽑히운 그릇인 바울로는 우리가 이것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보존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무죄하셨지만 당신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범죄자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여러분은 주 예수의 이 보배로운 잔을 마시고 만선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여러분의 도정에서 여러분의 속도를 늘려 주시어 당신 얼굴이 지켜 보시는 가운데 사람들의 위협에서 해방시키시며, 마침내 여러분을 영광의 충만함에 들어가게 하시어 평화의 아름다움과 신뢰의 장막과 풍요의 안식 가운데 영원토록 좌정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Agnus_Dei(빈소년합창단)



24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