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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3일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축일♬Angel-Ky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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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1-11 ㅣ No.869

 

축일 : 1월 13일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St. Hilarius, E. et D

AD 368   프랑스 프와티에의 성인.

 

성 힐라리오는 320년경 갈리아(오늘날 프랑스의 보아티에)시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그 나라의 귀족이었지만 이교도(異敎徒)였다. 힐라리오는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지만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헛된 세속의 쾌락을 물리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그 이유는 마음이 곧은 그가 일찍이 이교의 허무함과 이성에 배치됨을 깨닫고 진심으로 진리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新) 플라톤주의로 청년기에 우연히 책(성서)한권을 얻게 되어 그 후부터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오랫동안 동경하며 구하고 있던 종교라는 것을 확신하여 마침내 세례를 받고 거룩한 신앙심에 북받쳐 그리스도교적 완덕에만 진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아티에 시의 주교께서 서거하시자 그는 그의 후계자로서의 최상의 적임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어 주교가 되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는 이 학식많고 신앙이 두터운 주교를 선택해 진리의 옹호자로 만드셨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즉 그 당시 때마침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파(派)의 이단이 콘스탄티노 2세 황제의 지지를 얻어 삽시간에 서양 제국은 물론 동양에도 전파되었다.

 

힐라리오는 이에 대해 과감히 싸워 언변과 문필로써 전력을 다해 그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다. 이단자들은 이 훌륭한 인물을 자기편에 끌어드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성 주교의 신앙은 단호히 움직이지 않았고 위협이나 감언이설로도 끝내 성공을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원수들은 방법을 바꾸어 이번에는 백성들을 선동해 황제에게 힐라리오는 역적(逆賊)이라고 모함했다. 황제는 이말을 곧이 듣고 끝까지 올바른 신앙을 고수하는 주교를 소아시아로 추방했다. 그러나 힐라리오는 도리어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해 고생하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또한 감사했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 이역산천(異域山川)인 수천리 떨어진 타향에 귀양을 가서도 그는 조금도 낙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그는 더욱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힘자라는 데까지 싸웠다. 그때 그는 고국에 있는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어 신앙에 충실하기를 권면했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그의 신앙이 얼마나 견고하고 그의 학식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그가 귀양간 지방인 소아시아는 거의 전부 이단에게 침범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이단자들과 논쟁하고 그의 본래의 웅변과 학식으로써 바른 도리를 설명했다. 이단자들은 한 사람도 대항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입을 다물고 잠잠할 뿐이었으므로 마침내 할 수 없이 주교를 빨리 본국에 소환해 주도록 황제에게 간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힐라리오 주교가 오래간만에 전임지인 보아티에 시에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환영과 열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귀국 후 또다시 이단의 소멸에 노력해 대단하게 갈리아 전토를 이단에서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언젠가 주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을 모두 교회 전통의 교리에 일치시킬 수가 있었다. 다만 그 중에 한사람만은 종내 이단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제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다행히 교회를 이단의 설에서 인도해낸 힐라리오는 이제는 교회 내의 규율 확립과 신앙심의 부흥에 착수했다. 그 이유는 장기간 이단과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규율이나 신앙심을 전부 소홀히 하게 된 탓이었다. 이 계획도 그의 열렬한 권면으로, 또한 그의 몸소 실천하는 모범에 의해 짧은 시간 동안에 훌륭히 성공했다.

 

그리고 교회에는 갱생의 활기가 충만해 갈리아 사람들은 성 주교의 불굴의 노력에 의해 굳은 신앙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리우스의 이단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하느님 자신께서도 얼마나 힐라리오의 거룩한 활동을 어여삐 보셨는지 항상 그에게 용기를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기적을 행하신 적도 가끔 있었다. 그가 세례를 못 받고 죽은 어린아이를 소생시킨 일도 그 한 가지 예이다.

 

힐라리오는 366년 1월 13일 성인다운 훌륭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서방 교회의 성 아타나시오(아타나시우스)로 공경받는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삼위일체"이다. 또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음률을 붙인 찬미가를 활용했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와 시편의 주해서를 만들었다.

 

최초의 서방 신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에 관한 연구에서 그의 설(設)을 즐겨 인용하였으며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다만 그를 성인으로 공경할 뿐 아니라, 유배지에서 성인은 코스탄소 황제에게 12권으로 된 ‘삼위일체론’ 기록 해서 보냈다. 이 때문에 1851년에 성인은 교회의 박사 칭호를 받으셨다.

 

   ♬천사미사곡Angel-Kyrie

The Calling of St Peter-KULMBACH, Hans Suss von

1514-16, Oil on wood, 130x100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16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 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17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 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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