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상담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답변 글 역시 닉네임으로 표기되며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Re:이성을 볼 때 생각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인쇄

사랑과영혼 [61.106.83.*]

2008-01-21 ㅣ No.6247

 

   가톨릭 성소는 1. 사제성소 2. 혼인성소 3. 수도성소로 나뉘어집니다.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나 처녀 모두 신자 유무와 상관없이 영육적으로 건강하고 건전하며 조용한 여성, 부드러운 남성의 배우자상을 기대합니다. 이 때에 냉철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은 성혼을 앞둔 청년들에게도 요청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진흙으로서 조물주의 입김(고요한 말씀)으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에게 더 관대하고 호감을 갖는 것도 신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여러 유형의 같은 성별간, 배타적 심리를 제공하곤 하며 이성간에는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제공하는 지구본 자석과 배타 효과와도 상통하는데 이러한 것에 대한 심리적 현상은 오늘의 인터넷 공간에서도 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고 싶다면 예수 성심을 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이자 지름길이며 올바른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더우기 2003년 기준 세계 제1위의 낙태 왕국이었던 미국의 6배가 된 현 세속 한국 사회의 현실은 '대중매체 선용(이 기도도 검색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슴)'을 향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여자를 보게 되거나 만날 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의 고민 또한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 입장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환입니다. 쉽게 말해서 '늑대' 심리인가보군요^^* 그러다가 여우의 탈을 쓴 여시들한테 당하거나 진정 아름다운 '들꽃'의 식별력을 잃어갈 수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기혼자들에게도 절대적인 책임이 요구될 것입니다.

2000년대를 맞으며 서울 대교구 연구실에서의 박기주 미카엘 신부님께서 발행한 '복음 나누기 7단계'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우 해당 효과로서 '4단계 : 듣는다'에 이르러 '상상력이란 정신 작용은, 심지어 자는 동안에도 지속되는데, 이것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침묵'은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복음 나누기와 연관하여 몇가지 간단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에 대한 요약과 설명은 본 굿뉴스 '자유 게시판'에 등재되어 있슴)

사람의 상상력도 단순하게 볼 때 공익을 위해 쓰면 더 큰 기쁨이 돌아오고 이러한 절제, 온유, 성실등의 습성은 누구나 회복하여야 할 관건이기도 하기에 미사에 참례할 때는 '모든이의 모든것' 자체인 그리스도 제대를 지향하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미사 때에 어느 분은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하고 나오시던데 이는 주님 제단(반석)을 소홀히 여기는 관심 부족의 현상입니다)

생리욕 ▷안정욕 ▷소속욕 ▷겸손욕 ▷자아욕 순으로 발전되고 다시 반복되는 물레방아를 만나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아시다시피 쉬운 여정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대비책이 없으면 형제의 경우는 자칫 사회악을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에게 속수무책이거나 또는 역시 세계적인 매달권인 한국의 이혼과 낙태 성행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좋은 몫을 할 사람일 수록 더 큰 고통과 수련의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따라서 내적으로 여러가지 분심에 시달리는 현실을 이겨내고 싶다면 1. 생각도 침묵을 통한 진정한 침묵의 기도의 습관을 추구해야 하며 2. 능동적인 그 심리를 전화 위복으로서 보다 살아있는 고요를 추구해야 할 것이며 3. 과거나 미래로 분산되기 쉬운 평화를 이 순간의 평화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재현하며, 최후의 만찬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물려준 교회의 유일하고 거룩한 만찬제사인 미사(Missa)' 참례를 통하여 구현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소외시키는 이성, 감성파 정신과 의사들은 그를 찾은 신앙을 갖은 환자들을 통하여 왜? 하느님은 그토록 질시와 상처를 주는 하느님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즐겨 양심 성찰을 통하여 내가 '나의 죄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나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의식하며 나의 내적인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듯 사랑은 참으로 행복하며 참 기쁨의 소산이기에 1. 사제 2. 결혼 3. 수도 성소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선정적 매체를 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근거로 한 '제 6계 : 간음하지 말라'의 요약과 설명 단계로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통하여 사제나 수도자들의 맑고 경건한 음성을 접할 때 그 평화의 나뉨을 볼 수 있듯 역으로 이분들도 사람이기에 '기도'가 우선이 아닌 '봉사'가 우선인 삶을 지향했다면 틀림없이 음욕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우선적으로 바칠 수 있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1. 마음을 내가 아닌 그분 안으로 모으며 평화를 추구할 때 2. 방금전의 세상 소리 모두가 또한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리로 변화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은 앞서 지적한데로 나의 음성들 또한 사제와 수도자들의 그것처럼 조금씩 영육적으로 더 맑고 건강하게 변모됨을 볼 수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이 보다 절제, 호의, 선의등과 친교해 나갈 수 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접목(연리지)하면 두배의 기도인 성가를 부를 때에 나의 자아로 부르면 악보, 노랫 말등도 밋밋하거나 잘 안불리워질 때 내 마음을 주님께 의탁하려고 비우려는 찰나 옆 사람들의 하모니와 여러 아름다운 소리들이 귀를 통하여 들리기에 나 또한 잘난척하며 불협화음을 제공하던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님이 문의한 '성적 자아의 발견’이란 가톨릭 서적에서는 ‘성적 욕구와 느낌들 그 자체는 선하거나 최소한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아직 거기에 관심이 부족한 상태에서 1.생리적 본능(식욕, 성욕)안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니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습관으로 임한다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체득할 것입니다.

‘건강한 성적 공상’의 한계는 여기서 열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님의 젊음의 시간들을 계속 선익으로 투자해 보십시오. 하루가 마감 될 때도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어둠의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 기도를 방해할 지라도 위에 언급된 방법론등으로 더욱 수련하시며 참 자아이신 주님과 친교(화해, 인격적 만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위인전을 많이 보라는 말씀들도 좀 더 깊이 묵상해보면 2008년의 교부와 사도들의 전승과 성경을 통하여 더욱 순수한 어린이로 거듭나자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숙제 세가지 내어 드릴테니 묵상해보세요.

문제 1. 가톨릭의 뜻은 왜 보편성인가?

문제 2. 묵주기도 빛의 신비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성사생활을 세우셨으며 성모님은 왜 성체신심도 보호해 주실까?

문제 3. 때제 공동체는 왜 가톨릭 단체가 아닌 초교파 개신교일까?



306 0댓글쓰기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