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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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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건 [shinnara] 쪽지 캡슐

2004-03-10 ㅣ No.5998

느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

 

고속전철 개통은 2004년 우리 사회의 화두이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못해 철로 위에서 초고속 질주를 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도 이제‘속도’문화의 최첨단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사회를 지배하는‘빠름의 문화

 

  하기야 모든 것이 신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빨리 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서구의 경쟁, 전쟁, 적자생존’이라는 패러다임 아래 모든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사회로서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 패스트 푸드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원래 자연의 원리는 ‘곡선, 느림’이다. 정해진 순리에 따라 자연은 움직인다. 추위가 끝나면 봄이 오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낙엽이 뒹군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다. 이는 서두른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천천히 진행된다.

 

  필자도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현장을 누비다 보면 스스로 얼마나 서구적인 삶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자연 다큐멘터리의 하이라이트는 번식과 사냥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사고가 지나치게 서구적이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맹금류의 사냥 장면을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 또는 ‘강자의 성장을 위한 약자의 불가피한 희생’으로 설명하곤 한다.

 

자연을 다스리는 ’느림의 원리’

 

  자연이라는 거대한 원리는 적자생존이라는 틀로만 이해할 수 없다.

  쥐는 언뜻 보기에는 쓸모없고 퇴치해야 할 대상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만일 세상에 쥐가 없으면 인간마저 멸종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태계가 교란되면 상상할 수 없는 대변혁이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쥐는 하찮은 존재로 보일지 모르나 올빼미, 매, 여우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한 바 있다.

 

  중세 유럽에서 숲을 개척하면서 늑대를 제거한 결과 쥐의 개체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흑사병이 창궐했고, 우리나라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한 쥐잡기 운동은 그 부작용으로 여우의 멸종을 낳았다.

 

  따라서 쥐를 포식자의 사냥감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쥐가 있음으로써 맹금류들이 살아갈 수 있고, 또한 맹금류가 있음으로써 쥐의 급속한 증가를 막을 수 있다.

 

봉암사에서 만난‘자연의 시간’

 

  우리의 전통적인 생명사상 관점에서는 작은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까지도 소중하게 여겼다. 크기는 작지만 숲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풀이 없으면 숲이 없고 숲이 없어지면 풀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서구의 적자생존 원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느림의 미학을 채득할 때만이 이해할 수 있다.

 

  2년 전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위해 문경시에 있는 ‘봉암사’에 머문 적이 있다. 봉암사는 야생동물의 천국이다. 어느 누구도 동물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각자 나름의 생활 방식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올빼미는 스님들이 참선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한다. 두꺼비는 스님들이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사람과 야생동물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이곳에 속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님들도 자연의 일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개미가 다니는 길에는 행여 밟힐까봐 막대기를 놓아둔다. 그런 때문일까 잠자리는 스님의 매끈한 머리까지도 나뭇가지로 생각하고 앉아서 쉰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자연의 시간은 결코 달려가지 않는다. 모든 자연들은 서로 다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생의 존재로 살아간다.

 

  이는 ‘속도’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은 ‘느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신동만/환경 자연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경향잡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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