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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성 비오 5세 교황♬Ombra mai fu - Handel- Anthon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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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4-29 ㅣ No.1130

 

축일 : 4월 30일

성 비오 5세 교황

St. Pius V 1504-1572

 

독일의 세페르트 및 레프레르 두 박사의 편찬으로 되어 있는 교황사(敎皇史)에는 제1대 교황 성 베드로부터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까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 중엔 화려한 교황의 의장을 갖춘 모상이 있는가 하면 오른손을 들어 강복을 주는 모상도 있고, 독서와 집필과, 설교하는 모상 등 여러가지로 되어있으나,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 비오 5세 교황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실로 그 교황의 성품을 그대로 표현한 초상화라 하겠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신의 로마 시민에게 "비오 5세처럼 경건한 교황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교국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하는데,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신앙이 깊고 열심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백여년이 경과되는 동안 학식과 덕망에 뛰어난 교황이 적지 않았으나 성인품에 오른 교황은 최근의 성 비오 10세를 제외하고는 만나볼 수 없다.

 

교황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북쪽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보스코 마렌고에 있는 기슬리에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의 후손인데, 원래 이름은 안토니오 미카엘 기스리에리 였다. 어려서부터 이미 수도 생활을 동경해 부근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4세에 그 수도회에 입회해 더욱 면학에 노력하는 동시에 기도 고행 등 신심행사에도 더욱 주력했다.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가 된 후 여러 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했다. 1550년에는 코모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코모는 스위스 국경 근처여서 이단자들이 많았다. 그는 이후 종교 재판에 상당히 관여했고, 1556년에는 교황 바오로 4세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아 네피와 스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는 추기경이 되어 로마 교회의 이름난 종교 재판관이 되었고, 특히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여 교황청을 방문하는 자는 마치 수도원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게다가 그가 교황에 선출되자 시민들은 전래대로 성대한 교황 취임식이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이 다만, 취임식은 중지하고 그 경비는 모두 빈민 구제 및 경영이 곤란한 수도원 원조에 기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시민들은 모두 새 교황의 자선 박애 정신에 감탄했다 한다.그 외에도 비오 5세는 교황모자나 신발 없이 맨발로 로마의 성당을 순례했다고 한다.

 

비오 5세의 등극(登極)은 마침 트리엔트 공의회의 직후였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주교들과 신학 박사들이 그 회의 에서 결정한 것을 세밀히 실행하도록 하고, 종교 개혁의 미명하에 전 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빠지게 한 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우선 1566년에 교리서를 편찬해 완성했고, 1567년에는 이를 각구, 각지에 배부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서 참된 그리스도교의 쇄신과 혁신의 실적을 올려, 교황청으로 부터 주교, 다음은 사제, 수도자, 마지막 평신도까지 순서대로 점차 신앙새활의 향상을 도모했다.

 

그는 조금이라로 악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배격했다. 주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히 배격하고, 독성, 모독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했다. 비오 5세는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그의 연약함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 있었던것도 실로 이 같은 점에 기인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의 선임자들인 교황들에게는 누구나 다소 친척을 등용하는 악폐가 있었으나 그는 이점에 대해서 깊이 경계했다. 하루는 그의 시종들던 사람이 "성하께서는 이제 더러 친척 되는 사람들을 등용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권하니까 그는 정장을 하고 나서 엄연히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드로으 성좌를 주신것은 골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교회를 위한 것이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오 5세의 치하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회교의 왕 세림 2세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와 그 외 그리스도교의 여러 나라를 침범해 온 사실일 것이다. 용감무쌍한 터키 군 앞에서 어떠한 나라든 대항하는 나라가 없이 전 유럽은 그들에게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비오 5세는 묵주기도로 레반토에서 맞아 싸우게 된 오스트리아의 태자 돈 요한은 1571년 10월 7일 성모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지금도 그 날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되어있는 것은 그때의 성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St Pius, St Thomas of Aquino and St Peter Martyr-RICCI, Sebastiano

1730-33 Oil on canvas, 343 x 169 cm S. Maria del Rosario (Gesuati), Venice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의 카리스마를 "관상하고 관상한 것을 전한다"로 요약하였다.(도미니코수도회 홈에서.)

 

그는 주교들의 정주를 강조해 장기 출타 시에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했고, 신학교를 세우고 지방 종교회의 를 열었으며 성직자들의 회의를 독려했다. 그는 전례 갱신에도 노력해 두가지의 큰 업적을 남겼다.

 

1568년에 로마 성무 일도와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1567년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교회의 박사로 공포하고 1570년 성인의 전집 17권을 출판해 불가타 성서의 새 출판을 계획했다.그의 재임 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1570년 2월 25일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사벳 1세를 ’천상의 통치(Regnans in excelsis)’라는 칙서로 파문했다.프랑스에서 위그노 파의 근절을 위하여 드 메디치의 가타리나를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일치를 도모했으며,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스만투르크와의 대립에 있어서 교황은 유럽인들과 연합하여 유럽과 그리스도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함대들이 고린토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소위 1571년 10월 7일 레판토[Lepanto] 전투) 대승하였다. 이 승리를 로사리오 기도의 덕분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 승전을 기념하여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후에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되었음).

 

그는 1572년 봄에 병을 얻어 5월 1일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로마 시민은 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부음을 듣고서는 성인을 잃었다며 진심으로 슬퍼했다.그는 1672년 5월 10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0월 7일(게시판681번)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사리아축일)

 

이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항이 레판토 해전(1571년) 승리 기념일에 제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군사들은 그 때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신심의 전파는 1830년 이후 성모님이 발현하여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루르드(l858)·파티마(l9l7)·보랭(l932~l933)의 발현에서

묵주 기도를 특별히 권장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성화,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로,

1883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Supremi Apostslatus』에 의해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되었습니다.*묵주기도 성월 참조(게시판 674번 참조)

오늘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묵주기도는 침묵에 기도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를 의미하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 꽃다발’ 혹은 ’장미 화관’을 뜻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ract. 124,5: CCL 36,684-685)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쌍한 인류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지만 이 일반적 위로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위로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즉 그렇게 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느님께서 생각하실 때,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재생의 물을 통하여 온갖 죄의 씻음을 받은 이들이 영원한 단죄에서 해방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시련속에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육체적 영신적 위로를 얻어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앞에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해도 이 현세 생활에서의 나약성 때문에 아무 죄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청하는 죄의 용서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은 애긍 시사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인생의 역경에 직면하는 동안 복된 희망 속에서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므로 이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한 인간이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더 풍부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사도, 첫 사도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온 교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세에서 여러 가지 시련들, 말하자면 폭풍, 심한 비 그리고 태풍으로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먼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이 말씀으로 주님이 뜻하시는 바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으며 그 기초 위에 베드로 자신도 세워졌습니다. "에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이미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베드로를 통하여 천국의 열쇠 곧 죄를 묶고 풀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악에서 구출되고 죽기까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르게 됩니다.

 

 

 

 

 

♬Ombra mai fu - Handel - Anthon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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