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새 학사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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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찬 [dinnerpark] 쪽지 캡슐

2002-03-03 ㅣ No.2640

 조금은 차갑고 이지적인 인상, 그렇게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그러면서도 일면 순수함과 수줍음을 간직한 사람...심각하고 무거운 주제 앞에서도 큰 동요 없는 모습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대하는 친구...그렇게 ’정진’이라는 이름과 너무도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그는, 나와의 첫 만남 이후 2년여의 시간 동안 소년에서 청년으로 바뀌어 있다. 2000년 2월의 어느 토요일 밤, 의정부 한마음 수련장 본당 청년 피정에서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 본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뚜렷이 응시하는 곳 없는 시선을 안경 너머로 던지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 담백하리만치 수수한 분위기에 이상하게 끌린 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이에요?",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합니다..."  그 첫 마디를 시작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는 재수를 결심하고 있었다. 사제의 길을 걷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전에는 들지 않았던 느낌이 그 무렵 불현듯 들었다고... 그에게는 성소가 갑자기 찾아온 듯 했다.

  피정이 끝난 며칠 후, 나의 핸드폰에는 처음 보는 번호로부터 [새 문자 메시지]가 찍혀있었고,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은 메시지 내용에 들어 있는 그대로 [김정진베르나입니다^^]였다. (베르나는 그의 본명인 베르나르도를  피정 이후 얼마간 내가 그를 부른 애칭으로서, 당시 TV에는 "나와 내 가족의 첫차"라는 카피의 광고가 나가고 있었다^^;;). 그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이후로 그렇게 계속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2년 3월, 우리 처음 만난 그 장소에 그는 지금 다시 가 있다. 이번엔 본당 청년들과 함께가 아닌 서울교구 각지에서 선택된 다른 청년들과 함께이며, 며칠 뒤 그들은 진세를 버리고 그들의 육신마저 버린다는 노래를 부르며 혜화동의 한 학교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그들은 ’신학생’이라 불려진다... 작년, 아쉽게도 신학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렇게 일년의 시간을 더 정진한 정진이가 올해 드디어 학사님이 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나도 그를 더 이상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아우로서 대하지 않는다.

  그는 이번 피정에 들어가기 전 나와 만난 마지막 자리에서 돌연한 나의 ’학사님’호칭과 경어 사용을 상당히 불편해 하며 예전같이 대해 줄 것을 부탁했다. 분명 아직은 입학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학사님’이라는 호칭은 사실 올바르지 않은 모호한 단어라는 나름의 정당한 논리를 펼치면서 말이다. 하긴 ’학사님’이라는 말은 조금은 애매하고 어정쩡한 호격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나도 예전에 듣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를 대체할 마땅한 용어를 내가 아직 모르고 있고, 기실 우리 교회에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계신 분들을 칭할 수단으로 적당한 게 없으니 어떻게 새로 제정이  되던지 뭔가 바뀌기 전까진 그냥저냥 쓸 수 밖에...’신학생님’은 너무 어색하고 거추장스럽지 않은가-.-;; 그런 이유에 더하여, 이제부터 당신은 사적인 모든 인간 관계는 초월해야 한다고 내세우며 난 계속 그를 학사님으로 불렀다. 그때의 난처해하는 모습이라니^^...

 

  오늘 난, 입학식 날 학사님께 드릴 무제 노트 한 권을 마련했다. 아직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고, 심지어 지면엔 글씨 쓸 칸을 나눈 라인조차 그어지지 않은  하얀 공책을. 난 그가 아직 이런 순수한 백지 상태라고 믿는다. 그런 그를 하느님께서 채워주심에 따라 이 노트의 흰 부분도 점점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예수 닮은 한 사제 되어 그는 우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길이 결코 편안하거나 쉬운 길이 아닐지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주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다른 많은 이들을 기억하며 주어진 길 잘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쯤해서 학사님께 하고 싶은 말.

 

"사랑하는 학사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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