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중계동 성당 2. : 한 치 앞도 모르면서 : 셋째가 생기다
그렇게 시작된 반장 활동은 그런대로 순조로웠다.
매주 반모임을 했었던 터여서,
한달에 한번이라는 것이 오히려 여유로웠다.
전처럼 어린 아이도 많지 않았고,
우리 아이들도 오전에는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으므로,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다만 아무 친분 없는 어린 반장이 활동하기엔,
적잖은 상처가 있었다.
매주 첫 토요일 오전에는,
우리 구역 반장들의 반모임을 하였는데,
성당의 행사나 사정을 듣고,
반에서와 똑같이 반모임을 하였다.
이 모임은 각자의 반에서 겪었을 기쁨과 상처를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이런 동류의식은 특히 나이가 어린 편이었던 내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우리 구역에는 역전의 노장들이 많았다.
몇 분은 중계동성당의 나이와 똑같은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하시는 일이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말씀에 재간이 좋은 우리 구역장님도 암담해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게 문제다.
이제 모든 것이 익숙해질 무렵,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나도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째 소화도 안 되고, 춥기도 하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혹시 아기가?’
전혀 집히는 일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아이 둘과 동네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곱 살이 되는 큰 아이가
“엄마, 나 지금 가슴이 조마조마해.”
“그래? 엄마둔데......”
“엄마두 애기가 아니면 어떡하나 그래?”
“응? 으으응”
나는 그때까지 ‘아기면 어쩌나?’ 하는 맘으로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나는 정말 몰랐다.
내가 셋째를 가지게 될 줄은......
주위에서는 축복보다는 위로를 더 많이 해주었다.
나도 기쁨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얼떨결에 낳아 기른 두 아이를 생각하며,
이번만큼은 완벽한 태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두 아이 간섭에 태교고 뭐고
금방 낳을 때가 되었다.
유난히 더웠던 1994년 여름 어느 날,
이른 아침, 근처 산에 운동하러 간 남편이 새로 산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출산이 임박해짐을 느꼈다.
며칠 간 비가오고 난 다음 하늘이 맑고 푸르던 그날,
나는 셋째를 낳았다.
남편은 작은 걸(자전거) 잃고,
큰 걸(아기) 얻었다며,
더 이상 잃어버린 자전거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셋째여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강남성모병원을 고집했었는데,
앞 반의 반장님은 교우 중에 병원을 하고 있는 분을
주선해주셔서, 보험이 적용된 비용으로,
특별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셋째를 가졌을 때,
‘이번은 덤이니까, 저도 좀 닮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의 보조개도 좀.’
먼저 두 아이에게는 내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러려면 남편의 쌍꺼풀이나 깊은 보조개라도 닮든가......
그런데, 갓 태어난 셋째의 오른 쪽에 볼우물이 있었다.
게다가 윤곽도 어렴풋이 나를 닮아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 강인한 정신....... 할 걸‘
세상에 기쁨이 적지 않지만,
내가 셋째를 얻고 받은 기쁨을 비할 수 없다.
낳았을 때 기쁨보다 더 큰 것은
기르면서이다.
그 아이는 나의 존재이유가 되었고,
또 상심한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다 받으면 난 나중에 주님께 뭘 받나?)
나는 그 안에 주, 내 하느님을 본다.
이렇게 나는 또 다시 손과 발이 묶였지만,
정신은 더 자유로워졌다.(계속)
※ 앞 반 반장님 : 주영복(사비나)자매님 : 맏며느리인 제가 형님이라 부른 첫 번째 분이셨지요. 이사 와서 형님은 제게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지금은 레지오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그 때는 반장일을 하시면서도 어느 레지오 단원 못지않은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사비나형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