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동성당 게시판

다해 사순4주일 루가 15, 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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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pius12] 쪽지 캡슐

2001-03-25 ㅣ No.1119

그 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였다.

11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 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죽었던 내 아들이라고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으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털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하고 말하였다.

 

* 신약성서에서는 오늘 복음을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제목을 담고 있지만, 내용을 보게 되면 돌아온(되찾은) 아들이라고 제목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복음에서는 세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문제아 작은아들, 성실한 큰아들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작은아들은 방탕한 생활 끝에 회심한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무엇이든 잘하죠!

그러하기 때문에 이웃을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따라서 잘못한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용서할 줄 모르는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들들의 모습들을 함께 알아보도록 합시다.

먼저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을 달라는 모습을 보니까 대단히 뻔뻔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만, 그의 중심은 자립하겠다는 더 강한 마음이 앞서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한 사람은 독립적이고, 지배적이고, 그리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삶은 일종의 장기입니다.

남들은 다 졸이고, 나는 왕이다.

나의 업적과 재능은 특별한 관심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사람들은 내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태서 호의적인 보답을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사람들은 내 탁월한 재능을 존경해야 마땅하다.

나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는 사람들은 소용없다.

이러한 사항들을 볼 때에 마음이 강한 사람은 이웃을 군림하는 지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떻게 변화가 되는가?

지배자는 이혼이나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심장마비를 경험한다거나 하는 큰 충격을 받게 되면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약해지고, 자연스럽게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재앙이 외관상으로는 불행해 보이지만 이 때부터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완벽함과 지배적인 면이 깨지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복음에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듯이 마음대로 놀아났습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자신의 한계 부딪치게 되자 그는 알거지가 되었고, 어느새 강한 마음에서 약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약한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겸손한 마음인 것이고, 이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그가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되자 하느님과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큰아들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집 밖에서 아버지에게 그 동안 서운함으로 쌓였던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아서 큰아들은 자기 주장이 센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주장이 센 사람들은 보통 내가 바라는 일이라면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를 행합니다.

힘이 곧 정의다.

사랑은 나약하고 감상적인 정서일 뿐이다.

약함은 경멸하고 비웃음을 받아 마땅하다.

삶의 의미는 자기 추구에 있다.

사람들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이 이익이다.

사람들은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쫓아다닌다.

나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 나아가서 공격적인 사람들은 남에게 굴욕감을 주거나 남위에 군림하면서 기쁨을 맛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들은 남을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을 추켜세웁니다.

그들은 가정이든 어떤 공동체든 쑥밭으로 만들고서 그로 인한 분열상과 다툼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남을 비꼬는 버릇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입힌 이들에게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단점들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를 참을 줄 알아야 하고, 가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때는 부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판을 변명보다는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의심보다는 신뢰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공격적인 성향을 갖은 사람은 용기 있게 자신의 자존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은 사항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때부터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합니다.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체험인 것입니다.

물론 큰아들은 사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잠재된 자기주장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지 못한 모습을 통해서 그는 공격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성공을 하는데 만 외적인 모습에만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비록 잘못을 범했지만 외적으로는 재산을 탕진했고, 내적으로 자신의 욕심 마저 탕진을 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큰아들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작은아들의 모습입니까?

혹은 누구를 닮고 싶습니까?

아마 둘 다 닮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굳이 만들어낸다면 큰아들의 모습에다 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 큰아들처럼 열심히 살았다 하더라도 빈 껍데기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써 사순4주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즉 돌아온 작은아들에 대해서 매일같이 집 문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 깊은 사랑의 마음과 측은한 생각을 우리가 배우도록 합시다. 아멘!

 

비오신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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