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게시판

[상아탑]시(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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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0-23 ㅣ No.1559

   

속리산(俗離山)에서

 

  ---- 나 희 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은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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