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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씨네 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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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0-25 ㅣ No.1578

영화읽기 /  <영화의 역사(이야기들)>  ㅆㅣㄴㅔ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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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04년, 어둠 속의 빅뱅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의 역사(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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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지만 9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역사에 관한 영화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의 완성이었다. 영화 100주년을 맞았던 95년 이후로 고다르가 매달려왔던 이 작업은 현대의 산물이자 20세기 문화의 중심부에 있었던 영화를 지적으로 성찰한 ‘영화역사’이자 영화의 역사를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파고든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다르 이후’와 ‘고다르 이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다르의 모든 작업은 ‘현대영화’의 경계를 정의하는 중요한 나침반이 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을 그 자체로 뛰어난 영화작품이면서 금세기 영화역사에 관한 모든 지적인 의문과 해답을 포용한 난해한 영화역사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는 이 영화의 완성을 기려 영화의 모든 화면을 그대로 인쇄해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씨네21>은 금세기의 끝을 바라보면서 서구의 지식인 사회와 영화계에 꽤 큰 반향을 일으킨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에 관한 간략한 비평을 전재한다. 필자 김성태씨는 파리 3대학에서 최근 고다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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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중앙대 영화과 강사  

 

영화를 구하기 위한 영화

 

수많은 영화가 있다. 100년하고도 4년이 지나는 동안에 쌓인 영화는 수없이 많고, 그 중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만 추리더라도 족히 10년은 두고봐야 할 만큼 영화는 많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제 읽어나갈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에 관한 영화, <영화의 역사(이야기들)>(Histoire(s) du cin ma)은 과거의 수많은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있는 영화다. ‘생소한 영화’다. 사실 거기에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봐오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찰리 채플린, 장 르누아르, 존 포드, 프리츠 랑, 오슨 웰스, 프랑수아 트뤼포 등.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영화사의 인용들로 채워진 영화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러한 수많은 인용들로 인해,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 앞으로 읽을 것처럼 그것은 다시 보는 영화들이면서 동시에 처음 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이 이상한 인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생소함의 이유를 말하는 것에. 그렇더라도, 단지, 겉핥기뿐이라도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을 알아두는 것은 의의가 있다. 그것은 영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첫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것들과 같은 영화

 

다른 영화들과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이 ‘다른 지점’은 먼저 구성이다. 이 영화의 대상은 현실에서의 어떤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인물도 없고, 따라서 심리상태를 쫓는 카메라도 없다. 단지 우리가 봐온 수많은 영화의 조각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큐멘터리인가? 하지만, 아무도 이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화의 역사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영화사를 설명하는 기록영화는 아니다. 여기에는 설명이 없고 대화와 독백이 있으며, 자막이 없고 대신 텍스트가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보통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한다. 즉, 체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느껴지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영화들과 꼭 같고, 다만 대상이 생소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어떤 점에서는 극영화라고 부른다. 이 영화의 주제, 또는 이야기의 전체는 영화역사이고, 영화들이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인 셈인 영화. 따라서 보통 영화들에서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이 등장인물들(영화의 조각들)의 움직임, 성격, 의미를 쫓아감으로써 전체 이야기 안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한 일반적으로 영화가 기계적인 시간성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듯, 이 영화도 영화역사의 단선적인 진행(과거→현재→미래)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야기를 만나는 관객들이 새로운 시간, 영화적 시간(le temps cin matographique)을 체험하듯이, 이 영화가 구성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체험을 주기 위한 시간성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생각해 두어야 하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것과 같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고다르는 지난 1970년대의 복판에서 이런 생각을 담은 <다른 것들과 같은 영화>(un film comme les autres)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시간, 몽타주의 법칙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은 네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다시 각 장은 그 밑에 두개의 항목(A와 B)으로 나뉘어 있다. 이 네장의 구성은 똑같이 한짝(paire)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치는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죽음 뒤에 생성이 있고, 생성 뒤에 또다른 생성이 있다. 바로 이것이 우선 이 영화역사가 늘어놓는 것에 불과한 역사, 기계적 시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고다르는 기계적 시간 대신에 영화의 시간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몽타주의 법칙이기도 하다. 몽타주는 처음부터 시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엇갈리게 하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의 공식에 아무런 화살표도 집어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기계적으로 보는 대신에, 다르게 봄으로써 튀어나오는 의미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이것을 보는 방법은 쉽지 않다. 가능하면, 영화사를 많이 생각하게끔 이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화면의 일부를 가리는 기법)가 어떤 의미의 장치인지, 채플린의 육체는 어떤 의미였는지, 버스터 키튼은 왜 비극적인 모습으로 초상되는지 등등. 고다르의 이미지들이 결코 자의적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그는 훨씬 더 큰 사람이고, 더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다르 이전의 영화’가 있고,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있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먼저 어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둠. 이 영화의 첫 화면도 어둠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기본적인 조건은 어둠이기 때문이다. 빛을 통해 나타나는, 빛의 미립자들이 스크린에 충돌함으로써 나타나는 형상들을 보기 위해선 어둠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그러니까 적어도 완전히 다른 도구가 영화를 대체하기 전까지는 어둠은 영화의 첫장이고, 지난 일세기 동안 그래왔으니까 이것이 영화가 성립되는, 빛에 의한 이미지의 탄생을 체험하는 근본이라고 말하더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질료적인, 기계적인 조건이다. 영화인 이상, 어둠에 빛을 쪼임으로써 시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어둠은 달라 보인다. 그것은 질료적인 조건이기 앞서서 고다르가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영화의 정체성과 관련된 암호처럼 보인다. 그래서 여기에는 ‘자,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는 선언적 의미가 들어 있고, 이 어둠을 이용하는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밀알처럼 자라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둠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영화는 어떻게 이런 생성의 조건을 모방하고 있을까?(어둠과 빛의 시간적인 차이, 또는 히야투스는 서양문명이 기대고 있는 생성의 장면에서 보이던 것이 아닌가?)

 

 

어둠에서 빛의 생성까지: 제목의 비밀

 

이 어둠의 첫 화면 뒤, 다음 화면은 이상한 텍스트가 나타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불어도 영어도 아닌, 라틴어. ‘hoc opus, hic labor est’(이것이 작품이고 이것이 작업이다). 이 말의 의미로 인해, 이 첫 화면이 단순한 기계적, 질료적인 조건에 의해 한정된 평범한 조합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다시 말해,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이 필름은 영화의 역사, 의미를 캐는 작업,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해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당혹하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러한 배열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그러니 조금 더 따라가보기로 하자. 나는 우선, 앞의 두세 화면의 집합을 어떤 짝(couple)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은 다음에 이어 나오는 짝이 있다는 말이다. 자, 또다른 짝의 실체.

 

다음 화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면이다. 히치콕의 <이창>의 장면. 제임스 스튜어트는 망원경으로 어떤 장면을 보고 놀란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다른 영화의 장면, 오슨 웰스의 <컨피던시엘 리포트>의 한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 장면을 보고 눈을 떼며 놀랐던 것이다. 마치, <이창>에서 그랬듯이. 윈도+망원경+눈+놀람+장면(이야기). 이 공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는 시작한다. 어둠을 제치고 빛으로 형상을 수놓음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빛으로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했듯이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대신 보는 것이다. 윈도를 통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를 인도하는 카메라가 있고, 이 카메라는 아주 먼 거리(영화의 이야기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실제가 아니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바로 우리 눈앞에 갖다놓는 것이다(제임스 스튜어트의 망원경). 그래서 우리는 이 가까워진 거리에서 호흡을 죽여가며 긴장 속에서 그것을 본다(놀람). 영화는 이렇게 우리의 눈을, 한쌍의 눈을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경험이다.

 

영화가 탄생했고, 탄생한 영화의 모습, 정체는 이렇다. 처음부터 영화는 눈이었고, 따라서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 짝과 처음에 우리가 본 짝을 연결하면, 의미는 좀더 커진다. 이 영화는 영화의 역사를 캐는 작업(labor), 작품(opus)이고, 그 역사를 캐는 것은 단순히 사실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의 정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듯, 이 화면들 뒤에 바로 제목이 나온다. 제목 <영화의 역사(이야기들)>! 그리고 또다른 텍스트, ‘그 풍성함과 빈약함’!

 

이렇게 보면, 전체는 간단하다. <영화의 역사>는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왔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제목은 영화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영화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입구, 이 영화의 입구는 영화사의 중요한 의미, 우리들이 읽는 책에서 망각되었거나, 제거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역사는 그것이 드러내온 개념의 역사’(들뢰즈)라는 것이자 ‘영화는 영화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는 것’(고다르)이다.

 

우리는 책을 본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말을 한다. 글과 말, 이것들은 전부 언어라는 것에 기대고 있다. 언어는 구조, 또는 체계다. 언어라는 체계의, 구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설명을 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설명은 언제나 체계화라는 법칙을 따라간다. 그래서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순간에 ‘영화’는 사라지고 의미들만이 남는다. 이렇게 설명된 영화역사, 영화의 정체는 결국 영화들로부터 ‘끄집어내진’ 의미들이고, 어떤 이미지가 우리에게 인상적인 것이었으며, 어떤 영화가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즉, 대체로 정해진 범주대로 영화 또는 작가들을 묶어서 설명하는 식의 이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가치하진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말 또는 글을 사용할 때), 영화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들 안에서 영화를 발견할 수 없다(introuvable. 레이몽 벨루는 이러한 이유에서 영화가 늘 인용 불가능한 속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결국, 들뢰즈의 책이든, 오몽의 책이든 거기에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들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영화: 몽타주, 내 큰 근심거리

 

영화를 아는 것은 영화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몽타주를 보는 일이다. 그래서 고다르는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신이 몽타주 기계 앞에 선다. 그리고 작게 되뇌인다. ‘몽타주, 내 크나큰 근심거리’(<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고다르의 글 제목): 형상과 형상의 충돌, 소리와 소리의 충돌, 히야투스, 잡아먹힘, 교화 등. 그래, 영화의 발명은 다름아닌 몽타주의 발명이다. 그것은 이어 붙임과 떼어냄의 발명인 것이다. 처음의 짝이 갖는 의미가 다시 두 번째의 짝과 만나서 확대되는 것도 몽타주의 힘이고, 반대로 의미들이 중화되는 것도 몽타주의 힘이다. 영화는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 자신의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말과 글, 다큐멘터리는 몽타주가 아니다. 그것들은 결코 몽타주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고 자신이 쓰는 언어에 의해 의미를 강요한다. 언어에 귀속된 개념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을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고다르는 영화를 위해, 영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몽타주 기계 앞에서 근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몽타주의 대상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조합을 통해, 새로운 배열로 나타나는 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앞의 짝들 바로 뒤이어 나타나는 세 번째의 짝은 그래서 몽타주 기계의 화면이다. 그리고 기계 위를 흐르는 필름의 전진, 후진, 멈춤에 따라 변조되는 이미지가 전면에 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얼개라면 얼개이다. 하지만, 여지껏 빼먹은 것도 많다. 모든 것을 말하자면, 책을 써야 할 것이고, 그만큼 이 영화는 영화의 모든 것을 허락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그 전부를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왜, 이야기의 전체가 영화사이고 등장인물이 영화들인 영화를 고다르가 필요로 했을까를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

 

이 이유를 알아보는 일은 고다르라는 사람을 돌아보는 일이다. 고다르는 단지 하나의 시네아스트가 아니다. 그는 그 이전에 먼저 싸움꾼이다. 영화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카메라)을 팽개쳐버리고 자꾸 현실로부터 떨어지려 할 때, 그래서 허구를 향해 달려가려 할 때, 그 영화를 찌르기 위해 창을 날카롭게 가는 싸움꾼. 그는 카메라가 삼각대에 고정되어 세상의 내부로 들어가지 않을 때, 그것을 어깨에 들고, 손에 들고 세상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영화를 시작했고, 영화에 또다른 방법을 제공해주었다(60년대). 거기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는 또한 ‘참여’라는 말을 주워서 그것을 움켜쥐며 사르트르가 걸었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그것은 영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자꾸 최면화하는 영화를 그것과 거리를 두게 한 사건이었다(70년대). 격렬한 몸싸움의 시기가 지나가고 세상이 다시 그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법을 잊어버리고 친화된 공간, 따라서 거부감을 지워버리는 공간에서 TV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낄낄거리고 있을 때, 그는 바로 그 비디오 이미지를 들고 다시 싸움을 건다. 그는 이제 이미지의 흐름의 속도를 바꾸고 소리를 변조시켜가면서, 정상적인 것처럼 들리는, 보이는 그 소리와 이미지들 안에 숨긴 음모들을 파헤친다(현재). 그는 아직도 ‘영화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도구이고, 생각하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의 연속이 바로 이 <영화의 역사(이야기들)>을 만든 이유이다. 그는 가상공간의 <멋진 신세계>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지난 일세기 동안 영화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는 그렇게 여전히 그의 늙은, 이젠 그 무게마저도 지탱하기 힘들어보이는 그의 어깨 위에서 아직도 세상을 해독하고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렇게 세상의, 20세기라는 시간의, 그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한 영화의 모습에 대한 해독이고, 또다른 서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업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영화를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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