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록 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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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1-24 ㅣ No.8617

 

요한 묵시록 입문

 

 

1. 문학적 특성

묵시록은 신약성서에서는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은 대부분 실제적인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고, 사도들의 서간은 설명하고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묵시록은 ‘특별한’ 종류의 이야기 형식이라는 점에서 다른 신약 저술과는 다르다.

 

묵시록은 인간이 정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없는 이상한 것들을 보고 들은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묵시록은 신약성서에서는 유일한 형식의 책이지만 당시 세계에서는 흔한 이야기 형식이다. 그와 비슷한 책들이 구약성서에도 실려 있고, 다른 유다 문학에나 소위 외경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도교 문학에도 보존되어 있다. 묵시록은 소위 말하는 묵시문학 양식과 그와 결부된 예언 형식, 편지 양식, 연극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묵시록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1,1) 이 대목의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계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요한을 통해 하늘과 땅,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비밀을 계시하였음을 나타낸다.…

 

묵시록의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더 연구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나마 묵시록의 기능은 박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너무 단순하다. 사회적 위기상황은 일부 묵시문학의 배경을 이루는 요소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언제나 의미심장한 요소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념적 내지 전략적 요소가 묵시문학의 보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밀들이 계시되는 것은 시대에 대한 특정적인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듣거나 읽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다.

 

묵시록은 스스로 ‘예언’이라고 말한다(1,3;22,7.10.18~19).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렇게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계시를 전해주는 천사는 그의 “형제들인 예언자들”(22,9)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10,11 참조)는 말을 한다.

예언은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이었다(1고린 14,1~40; 마태 7,22; 사도 21,9; 1디모 4,14 등).

 

그렇다면 묵시록을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매우 근거있는 주장이다. 묵시록이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묵시문학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보다 작은 단위에서는 여러 예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예언적 신탁이다.

 

묵시록은 또한 서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계시 내지 묵시(1,1)라는 말과 예언(1,3)이라는 말로 이 책의 성격을 밝힌 서두 부분은 요한이 제3자에게 이를 전하고 있다. 묵시록의 나머지 부분의 거의 모든 곳에서는 1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넘어가는 대목(1,4)에서 서간적인 요소가 도입된다. 4장 5절 앞부분은 당시에 전형적으로 사용되던 편지의 서두다 <수신인-발신인-서두 인사>. 인사말은 갈라디아서(갈라 1,3)의 인사말과 매우 흡사하다. 바울로의 여러 서간에서는 인사 다음에 감사나 축복의 말이 뒤따른다. 그런데 묵시록에서는 인사 다음에 영광송이 뒤따른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전례적 요소다. 갈라디아서(갈라 1,5)는 영광송이 인사말을 마감한다.

 

묵시록에서는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서간문의 본론 부분에 영광송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개의 독립된 예언 말씀이 등장하고(1,7.8) 요한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셨는지 보고된 다음(1,9~3,22), 여러 가지 영상과 음성을 들은 내용이 소개된다(4,1~22,5). 끝으로 다양한 말씀들이 이어진 후(22,6~20), 축복의 말씀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22,21). 이 맺는말 역시 당시의 편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그러므로 서간 양식은 묵시록을 규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묵시록을 담는 일종의 그릇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묵시록이 서간 양식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필요에 따라서 생긴 결과일 것이다. 소아시아 지방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는 데 있어서 요한이 자연스럽게 서간 양식을 이용한 것은 그가 파트모스라는 섬에 유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1,9). 또 다른 가능성은, 편지가 당시 권위있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의사 전달 방식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로 사도가 이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유다인이나 로마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일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나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도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편지들을 써 보냈다. 묵시록 양식과 편지 양식을 복합시킨 것은 외경인 제2바룩 묵시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는 묵시록이지만, 환시를 본 바룩이 이스라엘의 아홉 지파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을 맺고 있다.

 

연극은 모든 등장 인물들을 청중 앞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문학 양식이다. 묵시록은 연극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직접적인 행동이 아닌 이야기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1인칭으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묵시록은 연극, 특히 비극과 흡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제가 희극과는 달리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신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시론 4,7~10.6,2). 묵시록의 주제 역시 매우 심각하다.

 

그리스 비극은 흔히 세 명의 배우와 하나의 합창대에 의해 연출된다. 연극은 배우들이 연출하는 사건들과 합창대가 부르는 노래가 번갈아 등장하는 형식을 취한다. 막과 막 사이에 합창이 나오는 한편, 터져나오는 기쁨을 노래하는 짧고도 활기 넘치는 노래가 등장하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에 합창대가 끼여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합창대의 한 사람이 간단한 대사를 노래하기도 한다.

요한은 자신이 본 천상 세계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묘사하면서 무리나 개인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식으로 이를 전개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발언(5,9~10; 15,3~4)은 일종의 노래다. 그리고 여러 대목(12,10~12; 16,5~7; 18,10.16~17.18~19)에서 영상으로 본 사건들에 대한 해설이 노래 형식으로 등장한다.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와 기쁨의 표현이 18장 20절과 19장 6~8절에 나온다. 이처럼 연출되는 행위의 중간 중간에 무리, 또는 개인이 끼여드는 노래 형식은 분명 그리스 비극에서 받은 영향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정서의 순화를 가져오게 한다”(시론 6,2). 당시의 비극은 의젓하지만 잘못을 저질렀거나 연약한 한 인간에게 어떻게 선에서 악으로 바뀌는 운명의 전환이 들이닥치는지를 묘사하였다. 관객은 그의 비운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는 한편, 그와 비슷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두려워하였다.

 

요한 묵시록 역시 다른 묵시록들처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믿는 이들이 세상에서 당하게 될 위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이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묵시록은 불신자들이 당하게 될 저 세상에서의 환난도 묘사하고 있다.

 

[카를로스 메스테르스(정승현 옮김), 누가 알아듣겠는가?(요한묵시록 주해), 117~122]

 

 

2. 저술 목적

요한 묵시록은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위기와 혼란이 몰아치전 시기에 특별한 목적을 갖고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3)가 헬레니즘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유다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저항과 반발이 거세게 일던 시기에 쓰여졌다. 요한 묵시록 역시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한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한 메시지는 신앙 고백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고 로마 제국이 취하고 있던 공식적 이교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증인이었다. 그는 그 옛날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말과 이미지들을 다시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한 마디로 “여러분은 세상에서 환난을 겪겠지만 힘을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요한 16,33)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다니엘서가 쓰여진 목적은 헬레니즘 이교도에 의해서 유다인들의 유일신 사상이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던 시대에 그에 대항하여 투쟁하도록 유다 민족의 위대성과 용맹심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함이었다. 요한 묵시록의 집필 목적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박해에 직면해왔던 (묵시 2,8~10.12~13; 6,9~11; 7,14; 13,11; 17,6; 20,4)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묵시록의 저자가 살고 있던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던 사람은 로마 황제였다. 소아시아 지방에 살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황제 의식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로마의 법은 모든 시민들에게 황제의 동상 앞에서의 희생제물을 봉헌하면서 ‘카이사르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치게 했던 것이다. 황제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에 그분의 이름을 굳게 지켜야만 했고 (묵시 2,13)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주님이라는 호칭을 부여할 수 있었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이미 상당한 숫자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 일로에 있던 순교자들에게 어떤 생명이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순교자들이 누리게 될 복된 삶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 순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행한 증언 때문에 살육 당해 제단 아래 놓여져 있는 이들 (묵시 6,9~11), 승리의 상징인 흰 옷을 입고 있는 이들, 하늘에서 영원한 축제를 거행하고 있는 이들 (묵시 7,9~17), 사탄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 (묵시 12,7~11), 어린양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나서는 이들 (묵시 14,1~5), 하늘로부터 복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들 (묵시 14,13), 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간 통치한 이들 (묵시 20,4~6), 그들이 바로 순교자들인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물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대상으로 묵시록을 썼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영토에 퍼져 있는 일곱 교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시련을 똑같이 겪고 있는 모든 교회들은 마치 묵시록의 메시지가 자신들을 위한 것인 양 묵시록의 메시지를 받아드이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현실의 유혹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묵시록의 독자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묵시록의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안병철, 요한 묵시록 1,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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