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0월4일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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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0-04 ㅣ No.676

 

10월4일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St. Francesco (1181-1226)

창설자.작은형제회 www.ofm.or.kr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의 자존심 따위도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시시의 부요했던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1182-1226년)는

그의 어머니 비카 부인이 요한으로 세례(9월 26일 성루피노성당에서 세례자요한)를 받게 했으나,

프랑스를 사랑하던 부친이 프랑스인이란 뜻으로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시대는 화폐 경제체제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

귀족과 시민자치단체가 대립하고 전쟁과 사회 변혁의 시대적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프란치스코는 명랑한 성격으로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던 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된 후로는 오랜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회복한 이후로 점차 딴 사람으로 변하였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가난한 이들 중에 그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기도 중에 들은 것에 완전히 복종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성프란치스코의 꿈

 

"프란치스코야,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스폴레토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성다미아노에서 "내 교회를 고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또한 나병환자와의 극적인 입맞춤을 통하여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후 그는 성 다미아노에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며,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보속 생활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성다미아노에서 십자가의 환시               성다미아노십자가

 

1205년말,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해에,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성당과

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포르치운쿨라)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성 글라라 대성당

 

1206년 4월, 그는 자기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주교앞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함.

 

1208년 2월 24일, 포르치운쿨라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복음말씀(마태오 10,9-10)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성프란치스코-엘 그레코 작

 

그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했으며,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 교외 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극도의 가난을 살았고,움막에서 살았으며,

일을하고 애긍을 청했으며,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며,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에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성프란치스코의 찬미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 2회 "가난한 부인회" 일명 ’글라라회’를 창설하였으며

글라라는 가난을 잘 이해하였고 프란치스칸활동의 특별한 의미와 풍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녀의 성소는 하느님과의 신비적이니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 생활을 만들었다.

(게시판 591번참조.성녀글라라축일 8월 11일)

 

술탄앞에서 시험받음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모슬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에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 했으나,

포로가 된 사실이 있으며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 초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 성지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성도미니코축일 8월 8일.게시판 590번참조)

 

1215년 11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도미니코성인을 만났을 것으로 본다.

이때 호노리오3세로 부터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허락받았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오직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가난했던 것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 철저한 고행을 했다.

그는 말년에 ’형제인 육신’에게 사과했다.

 

그의 가난은 겸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 겸손은 그가 선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마음의 길잡이이며 예수의 애덕에서 요약되고 성체 성사에서 완전히 표현되는 복음적 생활을 사는 것이었다.

 

1220년 총회에서 프란치스꼬는 장상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이것 또한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 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1223년11월 29일 승인을 받았다

 

교황호노리오3세 회칙의 인준

 

회칙을 인준받은 뒤, 그레치오에서 구유를 꾸며 성탄절 밤을 성대하게 지냈고,

이를 계기로 성탄절에 구유를 꾸미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성프란치스코-그레치오 구유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입었으니,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다.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셨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원하셨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 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성인의 일생을 그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것이다.

성인께서는 오상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 되었다.

 

1304년 베네딕토 11세가 오상축일을 제정하였으며,

9월 17일에 프란치스코 오상축일을 기념하고있다.(게시판 644번참조)

 

비교적 짧았던(그는 44세에 세상을 떠남) 그의 말년에는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리고 최초의 3회 회칙인 "생활지침"을 인준받았으며

시에나의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가 재속형제회의 첫회원이 되었다.

 

지금도 성인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고, 성인이 세운

재속 프란치스꼬회원도 다른 재속회원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어,

그분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한다.

 

1224년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으신후 고통 중에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움막에 거처하면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임종’자매인 죽음’을 맞을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태양의 노래

 

"오! 주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1226년 10월 2일 최후의 만찬을 재현했다.

10월 3일 해질 무렵에, 맨바닥에 누워 시편 142편을 불러주기를 형제들에게 청했다.

죽음의 순간에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주도록 청하였다.

 

성프란치스코의 죽음                         죽음을 맞이한 곳에 세워진 경당

 

성인께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서를 곁에 두고자 했고, 우리에게

"나의 아들인 여러분,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당신들께 작별을 고하니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시오.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며 당신들 모두를 그분의 사랑에 맡깁니다."라고 축복하여 주었다.

 

 

10월 4일 장례행렬이 아시시로 향하였고 다미아노성당에 잠시들러

글라라와 다른 자매들이 마지막으로 볼수있게 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처음 그가 다녔고 글라라가 처음 성인의 설교를 들었던

성 지오르지오성당(현재성글라라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230년 5월 25일 성 프란치스코대성당 제단아래로 옮겨졌다.

 

성프란치스꼬 대성당

성프란치스코대성당 제단

 

성인은 우리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이 불타올랐기에

그분에게는 오직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십자가의 수난을 아파하는 성모님,성프란치스코와 작은형제들

 

이같은 열정이 오상을 받게 하었고,이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완전히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적 형제애의 실현을 위해 형제적 순종,가난,작음의 덕성등,

성인께서 삶으로 증거해 주신 영성을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성프란치스코.새들과의 대화

성프란치스코동상과 비둘기들

 

이영성을 구현 시키기 위해 각자의 삶의 처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노력해야한다.

 

1226년에 선종하시고 2년 뒤에(1228년7월19일)시성되신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꼬만큼 교회 안에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1939년 프란치스코는 이태리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인은 작은형제회,글라라회,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태양의 노래], [평화의 기도] 등 놀라운 영적 발자취를 후세에 남겼다.

 

성 프란치스코의 시성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흠숭하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여기서 그리고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당신은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프란치스코)

 

옥좌에 앉으신 성모님,예수님,천사들과 성프란치스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소품집, 분도출판자, pp. 107-113)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

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www.ofm.or.kr

 

가난

순명   

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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