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목마른 영혼의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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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4-10-08 ㅣ No.3652

 



독일 바이에른 주말이어서 그런지 살롱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중년들, 탁자마다 혼자였다. 그들은 맥주 한 잔과 음식을 시켜놓고 250ml 정도 되는 맥주를 두어 시간에 걸쳐 마시고 있었다. BMW의 고장 바이에른, 잘사는 독일 중에서도 가장 살사는 지역, 먹을 것도 풍부하고 돈도 많은 이들의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 이들은 이 주말저녁 왜 혼자 맥주의 거품이 다 사그러들 때까지 혼자 앉아 있어야 할까. 이들 곁엔 왜 아무도 없을까.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대체 잘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문득 언젠가 읽은 미국의 골프영웅 할 서튼 생각이 났다. PGA골프 우승자이며 라이더스 컵 우승자인 그의 인터뷰 말이다. 미국 남부 석유재벌집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나 약관 25세에 전미국의 골프대회를 휩쓸고 난 후 10년간 세 번의 이혼을 하고 극심한 슬럼프에 뻐졌다가 재기한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소설가가 된다면 행복해질 것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다음엔 유명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우련히 운이 좋아 나는 유명해졌다. 그 다음엔 당연히 돈 걱정이 없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생활비를 다 쓰고 나서도 통장에 늘 100만 원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94년 여름 내가 낸 세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니 돈도 생겼다. 이제 1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자고 나면 통장으로 수천만 원의 인세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토록 사람이 그리웠던 나와 연결하고자 전화벨은 끝없이 울려댔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린 내 영혼은 시도 때도 없이 육체에 비상벨을 울려댔고, 나는 배고프지도 않은데 낮이고 밤이고 먹어대며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는지 내 몸은 영양분을 받아들여 눈치 없이 알뜰살뜰 지방분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돈과 명예가, 그리고 몰려드는 인터뷰가, 행복해지는 데 이토록 쓸모없는 것인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그 시기를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내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전에,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 놀랍게도 행복에도 자격이란 게 있어서 내가 그 자격에 모자라도 한참 모라란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할 서튼처럼 30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고 돌이키기 힘든 아픈 우두자국을 내 삶에 스스로 찍어버린 뒤였다. 그 쉬운 깨달음 하난 얻기 위해 청춘과 상처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 어쩌면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18년이었다. 그리고 돌아가 나는 신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항복합니다, 주님, 하고. 써 놓고 보니 우리말이 이상하기도 하다. 항복과 행복, 획 하나 차이의 낱말....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가 있다. "남들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시작하는 시, 왜 자유가 아니고 복종이 좋은지, 어릴 대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만해의 생각을 얼핏 엿본 듯도 싶었다. 신에게 돌아가 항복을 선언하고 내가 자유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전혀 자유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나 스스로의 강박과 어둠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성서의 말씀은 그러므로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기까지의 그 사이, 각 개인마다 특수하게 다를 미묘한 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고통일 수도 있고 그건 방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엎드려 중얼거린 대로 항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 세상을 버리고 싶었습니다. 한 때 나도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나를 아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내 삶을 증오하고 한 마리의 벌레처럼 스스로를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어 다시 일어날 때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떠돌다가 나는 엎어져버린 것이었다. 내가 졌습니다!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주님.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생은 길고 나누어야 할 것은 아주 많다는 것은 나는 이제 아니까. 밀알이 쪼개져 백 배, 천 배의 밀알이 되듯이, 쪼개면 쪼갤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이 지상의 유일한 것, 그게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알 것 같으니까. -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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