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가난한 마음,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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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4-10-08 ㅣ No.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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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 기다리는 마음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저는 수도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어떤 때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 때도 있고, 안온한 안정감에 대한 그리움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24년의 수도생활 중 갖게 되는 가장 큰 그리움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우리 곁에 계시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말을 매일 하느님께 하고 삽니다.

이제 저도 나이가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체험하는 가난이 육체적인 능력의 상실입니다. 시력이 나빠지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기력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또한 음악이 시끄러운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을 좋아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 많은 데 가면 그냥 피곤해져요. 이처럼 가난의 체험은 몸에서부터 오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체험하는 가난은 기억력의 상실입니다. 뭔가 기억해내려면 한참 생각해야 해요. 그러나 고맙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만 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잃어가면서 얻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얻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절박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상실하는 체험을 할 때, 나는 하느님이 정말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머리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고백입니다. “주님, 나는 내 가난을 몸 속 깊이 알기 때문에,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능력을 상실했을 때 다음으로 얻게 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가난을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는 어느 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구나라는 체험을 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문득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연세 든 수녀님께서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움직일 수 있고,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00점이 아니면 힘들어지고, 자신이나 타인이 미워지고, 어떻게 하든지 100점을 만들려고 정말 힘들게 노력했는데, 어느 날 자신의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50점만 되어도 참으로 고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고, 보다 너그러워지게 하며,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쌓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역설적이게도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가난의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풍요로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상에는 두 가지 작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용하는 작전과 사탄이 사용하는 작전입니다. 사탄의 작전은 사막에서 하느님이 유혹받는 장면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부유함을 좇는 소유욕과, 영광을 좇는 명예욕 그리고 교만함입니다. 인간은 이 세 가지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진정한 행복은 가난하고 미천하고 겸손한 것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나라로, 마음의 평화로 가는 방법은 이 세 가지 밖에 없다고 합니다. 소유보다는 가난함, 명예보다는 불명예, 교만함보다는 겸손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작전을 따라가기보다 사탄의 작전을 따라가기가 본성적으로 쉬운 것 같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모욕을 당하면 못견뎌하고, 누가 날 인정해주지 않으면 속상해합니다. 그리고 고통은 피하고 즐거움은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가난하고, 겸손하고, 명예를 좇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작전을 일상에서 사는 것이 본성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작전대로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방법을 마련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원해서 당하는 고통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누가 주는가? 물론 객관적으로 세상에 있는 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고통은 아무도 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이건 마치 철봉에 매달려 있으면서 힘들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철봉을 놓아버리고, 땅으로 내려오면 괜찮은데, 많은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아니면 자기의 능력을 증명해보이려고 힘들어하면서 마지막까지 달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에서 욥은 고통을 겪을 때 왜 나냐고, 하필 왜 나냐고 묻습니다. 저는 소설가 박완서 씨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박완서 씨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었을 때, 3년을 하루같이 하느님께 왜 그게 내 자식이어야 하느냐고 미친 듯이 묻습니다. 결국 부산 광안리 수녀원에서 박완서 씨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왜 네가 아니어야 하느냐?”고 그러니까, 본인이 할 말이 없어지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오해를 받고 있을 때, 가끔 저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잘났으니까, 아니면 내가 두려우니까, 아니면 내가 힘드니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 내 몸에 힘을 빼면서 당신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전통은 가난과 겸손을 체험하면 할수록 더욱 더 영적인 풍요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안에 불만을, 불행감을 가득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속에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첫째, 불평이 많은 사람은 만나는 사람 모두를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하는 ‘부모’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인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욕구와 가치와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무엇이든지 내어주고 베풀어줘야 하는 부모처럼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생활 27년 동안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대요. 그런데 한번은 너무 아파서 식탁에서 남편에게 얘기했대요. 남편이 하는 한마디는 “병원 가봐”였대요. 갑자기 배신감이 들더래요. 지금껏 이런 인간하고 살았나 싶고, 내가 병원 갈 줄 몰라서 못 가나 하는 생각이 들러라는 거죠. 따뜻한 말 한마디 듣고 싶은건데. 하지만 여러분이 아팠을 때 머리맡에서 24시간 지켜줄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바로 어머니예요. 물론 요새 엄마는 그러지도 않지만요. “어디 아프냐? 병원 데려다줄까.” 뭐 이렇게 말해주는 남편을 만난 사람은 그저 고마운 거죠. 다행인 거고, 그건 복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남편이라고 반드시 부모처럼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둘째로 이런 사람들은 안 나오는 젖인 줄 알면서도 계속 빈 적을 빨면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우는 아이와 비슷합니다. 제가 아는 선생님 중에 항상 인상 쓰는 분이 계세요. 그것 때문에 어떤 학생은 3년 내내 상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인상 쓰도록 그냥 놔둘 수가 없었던 거죠. 어떻게 선생님이 인상을 쓸 수 있느냐는 게 그 학생의 생각이었죠. 제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빈 젖좀 그만 빨아라! 인상 쓰고 살라고 그냥 둬라! 그 선생님 부인도 인상 쓰는 남편과 함께 사는데, 학생인 네가 왠 난리냐?” 그 학생의 말은 이랬습니다. “안 돼요! 어떻게 선생님이 인상을 쓸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100점짜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균이 50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들 고만고만한 중간짜리들입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세상이 완전하지 않아서, 자신이 완전하지 않아서, 타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계속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니 이것이 우리 자신들인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들은 상대에게 100점을 기대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신만 상처입고 두들겨 맞고 울고 있는 아이와 비슷합니다.

셋째, 불행감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끊임없이 과거에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과거에 살면 살수록 원통해지고, 미래에 살면 살수록 불안해집니다. 가능하면 현재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감사하면서요. 우리는 일상에서 전혀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진짜 하느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당신 마음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인내하십시오. 질문 그 자체를 사랑해보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대답을 찾지 마십시오. 지금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대답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당신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을 가지고 살다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어느 날 대답이 우리 안에서 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에서 -

- 채준호 신부(대림절 피정강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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