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나해 그리스도왕 대축일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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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58.38.*]

2009-11-21 ㅣ No.878


그리스도 왕 대축일〔나해〕


♣참고:이 글 중에 밑줄이 그어진 성경 구절이 나오면, 학습자들이 그 구절을 찾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입문


1926년에 비오 11세(Pius XI) 교황에 의하여 제정된 이 축일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dominion)을 자각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하여 그리고 민족들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10월의 제일 마지막 주일에 경축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이 축일은 대림시기(Advent) 이전인 전례력(Liturgical Year)의 제일 마지막 주일로 옮겨졌는데, 이 날에 인류는, 축성된 성체(Blessed Sacrament) 앞에서 바치게 되는 하나의 기도인, 예수 성심 호칭 기도(Litany of the Sacred Heart)를 통하여 성심께 봉헌된다(consecrated).


이 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심을 전적으로 비세속적인(non-worldly) 방식으로 경축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의하여 기쁨(gladness)이라는 기름으로써 영원한 대사제(Eternal Priest)와 만국의 왕(Universal King)으로 기름 부어졌다. 영원한 대사제로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Cross)라는 제대 위에서 봉헌하셨으며 이 한 번의 완전한 평화의 희생 제물로써, 인류를 속량(贖良)하셨다(redeemed). 만국의 왕으로서 당신께서는, 당신께서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은총의 왕국, 정의, 사랑, 그리고 평화의 왕국을 전지전능하신 성부께 봉헌할(present),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dominion)을 선포하신다.



제1독서 - 다니엘 7,13-14


지난 주, 즉 나해 연중 제33주일에 우리의 제1독서로서 우리는 다니엘의 네 번째 종말론적 환시로부터 들었으며 그리고 오늘을 위한 우리의 제1독서를 지난 주의 복음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학습의 일부분으로서 언급하였다. 오늘의 제1독서는, 네 마리의 짐승에 대한 환시인, 다니엘의 첫 번째 종말론적 환시로부터인데, 이것은 제7장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Jerome Biblical Commentary와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둘 다는 “모든 성서 해석자들은 이제 이 환시의 네 마리의 짐승들이 네 개의 이어지는 다신교 제국들을 나타낸다는 것에 동의한다”라고 말한다:
     1) 바빌론 제국(the Babylonians)
     2) 메데스 제국(the Medes)
     3) 페르시아 제국(the Persians)
     4) 그리스 제국(the Greeks)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메데스 제국은 키루스 왕의 지도력 아래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메데스 제국의 연합(이것을 Medo-Persian이라 부른다)의 일부로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적이 전혀 없었다. 위의 나열 대신에, 다음의 네 개의 이어지는 다신교 제국들이 제시된다:(각주1)
     1) 바빌론 제국(the Babylonians)
     2) 메도-페르시아 제국(the Medo-Persian)
     3) 그리스 제국(the Greeks)
     4) 로마 제국(the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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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다음의 지도들을 순서대로 참고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EmpireDavidSolHR.htm (다윗 왕국, 기원전 1000-925년)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EmpireAssyriaHR.htm (아시리아 제국, 기원전 824-625년)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Empires6centbcHR.htm (거대한 제국들, 기원전 6세기)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EmpireAlexanderHR.htm (그리스 제국, 기원전 323년)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Rome117HR.htm (로마 제국, 기원후 117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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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다신교 제국들 각각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점령들의 각각은 다음과 같이 점령자의 회심(conversion)으로 끝이 났다:
     1) 바빌론 제국 -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 다니엘 2,47; 4,34
     2) 메도-페르시아 제국 - 키루스(Cyrus) - 2역대기 36,23; 에즈라 1,2
     3) 그리스 제국 - 안티오코스(Antiochus)(각주2) - 1마카베오 6,12-13
     4) 로마 제국 -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 기원후 313년


첫 세 개의 점령들은 유다주의(Judaism)로의 회심으로 끝이 나게 된 반면에 네 번째이며 최후의 점령은 그리스도교로의 회심으로 끝이 났다.

또 다른, 똑같이 흥미를 자아내는 해석은 네 번째 짐승이 마카베오 왕국(the Maccabees)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유다인들이고 그리고 그리스 제국으로부터 왕권을 인계받았지만, 그들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다윗 왕좌의 적법한 상속자들이라기보다는 점유자(occupiers)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은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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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2) 안티오코스(Antiochus)에 대하여서는 본 해설서의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요한 묵시록 7,2-4.9-14) 해설의 각주를 참고하라. 그리고 다음에 있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1마카베오 1,1-15.41-43.54-57.62-63)에 대한 나바르 주석 성경의 해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3_m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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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제1독서는 다니엘의 환시에서 네 번째의 짐승이 파괴되고 난 직후에 발생한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의 형태로. 마치 첫 네 개의 모습들이 짐승들을 닮았던 것처럼, 환시에 나타난 사람을 닮은 모습.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하느님으로부터. 네 짐승들은 ‘바다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악의 힘들로부터이다. 네 마리의 짐승들이 나라(kingdom)들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태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symbol)인데,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the saints)으로 이루어진 나라에 대한 상징이다(다니엘 7,18).


사람의 아들(Son of Man)에 대한 개념이 신정주의 나라(theocratic kingdom)를 위한 수사학적 표현(a figure of speech)으로부터 메시아적 왕(messianic king) 자신을 위한 용어로 마침내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시기보다 1세기 혹은 2세기 이전에 저술된, 외경인 에녹서(Enoch)에 나타난다.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제2독서 - 요한 묵시록 1,5-8


요한 묵시록으로부터인 오늘의 제2독서는 서두 인사말(opening greeting)과 찬가(doxology, 영광송)로부터 발췌한 것이며, 어떤 편지이든지 간에 글쓴이를 확인하기(identify) 위하여 마련된 편지의 부분은 일반적으로 뒤따르게 될 가르침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읽는 이들에게 화려한 찬사를 듬뿍 베푼다. 이 경우에 있어, 이 편지는 소아시아(Asia Minor)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로 보내진다. 비록 이 일곱 교회들이 호명되고 있으며(요한 묵시록 1,11; 제2-3장), 그리고 뒤따르는 묘사들로부터 저자가 이들 실제 교회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가 또한 언급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이는 숫자 7이 계약의 숫자이고, 이들 교회들은 지도 위에 원의 형태(circular pattern)로 존재하며, 그리고 다른 교회들이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5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언급이다. ‘증인(witness)’이라는 용어(그리스어: martyr)는 처형당한 자를 말한다. 이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중요성은 하느님에 반대하는 전쟁을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당신께서 불리하게(against) 증언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당신께서는 그들을 처형하는 데에 있다.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은 이들로부터 당신의 부활에 의하여, 예수님께서는 지고(至高, supremacy)를 획득하셨으며, 그 결과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셨다’(콜로새 1,18).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찬양. 당신께서는, 이 시대에, 우주의 왕(universal king)이시다 - 당신께서는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반면에 당신의 모든 원수들은 당신의 발아래 잡혀 있는 중이다(마태오 복음서 22,44; 마르코 복음서 12,36). 이들 세 개의 호칭들은 신앙의 핵심 내용들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이 구절을 정확한 말로 표현하는 것(wording)은 신약 성경에 있어 요한 묵시록에 유일하다. 이 기본 개념은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이다(로마 3,21-26; 갈라티아 2,20를 보라).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위업은, 금송아지 숭배라는 죄 때문에 정지되어 있었던, 탈출기 19,6의 계약을 구현하신다. 여기서 한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사탄 아래가 아니라 하느님 아래에 있음을 뜻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자는 모두, 하느님과 나머지 인류 사이의 중개자(mediators)들인, 사제(priests)들이다.(각주3)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는 가까이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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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3) 다음은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의 차이점에 대한 엮은이의 졸글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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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이 구절은 심판에 대한 가장 친숙한 성경적 묘사들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오늘 우리의 제1독서인 다니엘서 7,13을 마음에 떠올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즈카르야서 12,10. 이들 두 개의 구약 성경 발언들은, 이 묵시록의 저술 시기쯤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재판관으로 돌아오심에 대한 예언들로서 이미 해석되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화자(話者, the speaker)로 분명하게 식별되고 있는, 요한 묵시록에 있는 단 두 개의 구절들 중의 첫 번째 구절이다(다른 하나는 21,5-8이다). 당신께서는 모든 역사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원천이시며 목표이시다(로마 11,36).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이며, 시작과 끝을 나타낸다(이사야 41,4; 43,10; 44,6; 48,12를 보라). 하느님과 그리스도 두 분 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주장하시는 사실이 요한 묵시록에 대한 초기의 일부 주석자들에게 어려웠던 것이 입증되었다. 비록 주석자들이 어떻게 꼭 같은 호칭이 하느님과 그리스도 두 분께 적용될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고심하였으나, 요한 묵시록 자체는 자주 다른 한 분께 말해 질 수 있는 바를 각 한 분께 말했는데, 그리하여 이 두 분들 사이의 관계의 친밀함과 이 두 분의 본성의 하나 됨을 강조한다(highlight). 삼위일체 신조(Trinitarian formula)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Nicene-Constantinoplian Creed, 기원후 381년) 때까지 전개되지 않았다.  



복음 - 요한 18,33ㄴ-37


오늘의 복음 말씀은 나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 복음 말씀에 해당한다. 이 복음 말씀이 요한 복음서로부터 발췌된 이유가 단순히 마르코 복음서가 너무 짧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나, 이 이유보다는 좀 더 타당한 신학적 이유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3분 복음/교리 묵상 다음에 있는 글을 읽어보도록 하라.


오늘의 복음 말씀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kingship)에 대한 묘사를 요한 복음서로부터 읽는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왕권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는 궁전, 곤룡포(royal robes, 袞龍袍, 黃袍)들, 호화스러운 연회, 은과 금, 권력과 영광을 상상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진리, 배반, 피, 죽음 그리고 통탄(痛歎, bitter lamentation)을 듣는다.


전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셨으며 그리고 대사제 한나스(Annas)는 그의 신문(interrogation)을 마쳤으며,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다른 대사제인 카야파(Caiaphas)에게로 보냈다. 우리는 그날 밤이 추웠고, 베드로가 숯불 근처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있었던 것으로 두 번씩 묘사되고 있음을 듣는다. 날이 새자[성 금요일(Good Friday)] 예수님은 빌라도(Pilate)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관중으로부터 분명한 고소장(indictment)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에 대한 내사(內査, private inquiry)를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총독 관저[praetorium (로마 법정)] 안으로 불렀다.


빌라도와 유다인들이 서로에 대하여 경멸감을 가지고 대하였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빌라도의 신문(questioning)은 예수님을 향한 이 사람들의 태도를 그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는 로마법에 유효성을 가지고 있을 예수님에 반하는 죄목(charge)을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아무런 구체적인 죄목들 없이 고함을 쳐 빌라도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지를 행하게 하려는 그들의 애초의 노력을 예수님의 적들은 결론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빌라도는 이러한 요구들 아래에 자신이 말려들게 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목숨에 대한 자신들의 속셈(designs)을 있는 그대로(bluntly) 말하도록 유다인들에게 강제하였던 것이다.


다른 세 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 복음서는 복음사가 요한이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다른 날짜에 두는 점에 있어 유일하다(unique). 공관 복음서(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들 모두는 최후의 만찬을, 그 다음 날에 일어나는 예수님의 희생이 부착된(with) 파스카 식사(Passover meal)로서 제시하고 있다. 복음사가 요한은, 성찬례에 대한 그의 강조 때문에, 파스카 어린양(Passover lamb)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sacrifice) 시간과 꼭 같은 시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가져다 놓는다. 사도 요한은 그의 이야기에 있어 구약 성경의 파스카 표상으로부터 많이 묘사하고 있다(draws). 

오로지 요한 복음서에서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복음서 1,29, 36)으로 선포되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복음사가 요한은 유다인들이 파스카 식사[수난 주일(Palm Sunday)]를 위하여 어린양을 마련하여야 하는 바로 그 날에 예수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배치하는 데에 매우 신경을 쓰는데, 이는 어린양이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이 양이 모든 흠(blemishes)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탈출기 12,3-6) 유다인들은 이 어린양을 나흘 동안 관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는, 조심스럽게 예수님을 조사한 후에 예수님이 흠을 갖고 있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빌라도를 가지고 있다: 빌라도는 ...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소.”(요한 복음서 18,38).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요한 복음서 19,4).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요한 복음서 19,6)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국면(point)에서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보내진다. 오늘 우리가 듣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조사이다.


요한 복음서는 십자가라는 제대 위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파스카 어린양의 요건들을 충족시킴을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보고한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탈출기 12,46)(요한 복음서 19,33-34.36).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새 파스카의 희생 제물이 되심을 보이기 위하여서인데, 이 파스카 식사는 당신의 생명의 빵 설교(His Bread of Life Discourse)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식사이다(요한 복음서 6,25-7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계약의 일부분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먹히어야만 하는 바로 그 식사가 되신다(탈출기 12,8).


33ㄴ [그때에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를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할 어떠한 것도 이전의 이야기에 없다. 성 요한 사도는 빌라도가 제30-32절에서 그가 유다인들과 하였던 대화 속에 포함된 예수님께 대한 정보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이미 확보하였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 요한이 6,15와 12,12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러한 사건들이 예수님이, 로마 군대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유일한 죄목인,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다른 질문으로 답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대답하는 것을 거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임무가 영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 하고 계신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과 비교하라(마태오 복음서 16,17)]. 빌라도의 질문은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 아니다. 이방인에게 있어, 유다인들의 왕은 로마 제국의 전복자(subverter)를 말한다. 유다인 민족주의자에게 있어, 왕-메시아(King-Messiah)는 로마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획득할 정치적-종교적 해방자(liberator)를 말하였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유다인들에 대한 빌라도의 경멸이 분명하게 된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일들을 돌보기 위하여 거기에 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로마 제국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로마 제국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의 왕권을 분리시키는데, 이는 당신의 왕권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증명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지금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석방을 확보하기 위하여 싸우는 추종자들을 전혀 가지고 계시지 않다. 빵들과 물고기 증식의 기적(the miracle of th multiplication of the loaves and fish) 이후에(각주4), 예수님께서는 몸을 피하셨는데 이는 이 백성이 예수님을 세속의 왕(earthly king)으로 선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요한 복음서 6,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그리고 환호를 왕-메시아로서 받아들이셨다(요한 복음서 12,13).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당신께서 진실로 왕이심을 인정하시나 - 그러나 또한 당신의 왕권이 세속적 왕권이 아님을 또한 분명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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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4) 이 ‘빵들과 물고기 증식(multiplication)의 기적’을 ‘증식’에 해당하는 표현을 생략하고는 단순     히 ‘빵의 기적’으로 번역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335항의 표현은 이 기적이, ‘나눔의 기적’이     아니라, 자연법적 설명과 이해를 초월하는 ‘물리적 기적’임을 바로 알아 볼 수 없도록 하는 심각     한 수준의 번역 누락이라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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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유다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예수님을 이미 거부하였던 자들로부터 예수님을 떼어 놓는다(separates).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오늘날의 법정처럼, 단지 “예” 혹은 “아닙니다”로 대답한다. 빌라도는 솔직한 답변(direct answer)을 원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한 빌라도의 인식(sense)에 있어, 예수님은 왕이 아니시다. 다른 인식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이미 암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왕이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왕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왕이시다. 이 마지막 절들에서 우리는 이 복음서에 있는 거룩한 말씀(the Word)을 듣는다(요한 복음서 1,14. 1,17; 8,32; 14,6; 14,17; 15,26; 16,13; 17,17-19를 보라).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진리와 생명의 편 혹은 당신을 거부하였던 자들의 편에 설 것을 함축적으로(implicitly) 요구하고 계신다.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413.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social inequalities)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CCC 1936-1938, 1946-1947 


수많은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죄로 물든(sinful)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inequalities)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불평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개적 모순(open contradiction)이며 그리고 정의에 반하고(contrary to), 사람들의 존엄(dignity)에 반하며, 그리고 평화에 반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는 하느님의 계획에 속하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하여 비롯되는 차이들이 존재합니다. 진실로, 하느님께서는 남녀 각자가 필요로 하는 바를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기를 원하시며(wills) 그리고 특별한 재능(talents)들이 주어진 자들이 이 재능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차이들은 사람들이 관용(generosity)과 친절의 실천 그리고 재화(goods)들의 나눔이라는 실천을 할 것을 격려하며 그리고 자주 사람들에게 이들을 실천할 의무를 부과합니다. 이 차이들은 또한 문화(cultures)들에 대한 상호 풍요(mutual enrichment)를 촉진합니다(foster)(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king_c1936.htm


CCCC 414. 인간의 연대성(human solidarity, 단일성, 일체성)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요?
CCC 1939-1942, 1948


인간의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brotherhood)로부터 솟아나오는 연대성(solidarity, 단일성, 일체성)은 우선적으로 재화(goods)들의 공정한 분배(just distribution)에 의하여, 일에 대한 적정한 보상(a fair remuneration)에 의하여 그리고 더욱 더 공정한 사회 질서(just social order)를 위한 열심(zeal)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연대성(단일성, 일체성)이라는 덕목(virtue)은, 물질적 재화들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신앙(faith)이라는 영적 재화들의 함께 나눔을 또한 습관적으로 실천합니다(practices)(엮은이 번역).

 

주: 다음은 Merriam-Webster's On Line Dictionary에 실린 solidarity 단어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에 의하면, 이 단어를 ‘연대성’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단일성’ 혹은 ‘일체성’으로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solidarity
Etymology: French solidarité, from solidaire characterized by solidarity, from Latin solidum whole sum, from neuter of solidus solid
Date: 1841
: unity (as of a group or class) that produces or is based on community of interests, objectives, and standards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w/solidarity.htm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king_c193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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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해설서 본문의 오류수정 및 내용보강 자료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제공될 예정이오니 본문 학습에 앞서 꼭 확인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king.htm 
(꼭 클릭하여 살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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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시기 주일 중에 요한 복음서 제6장 말씀들의 학습에 대한 고찰

 

나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복음 말씀은 나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 복음 말씀에 해당한다. 이 복음 말씀이 요한 복음서로부터 발췌된 이유가 단순히 마르코 복음서가 너무 짧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이 이유보다는 다음과 같은 좀 더 타당한 신학적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 매년 연중 제2주일 복음 말씀이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되고 있다. 즉, 가해, 나해, 다해의 연중 제2주일 복음 말씀들은 요한 복음서 1,29-34; 1,35-42; 그리고 2,1-11이다. 이들 이외에 가해와 다해의 연중 주일 복음 말씀들은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되지 않고 있으나, 나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17-21주일 연속 다섯 주일들에 걸쳐 요한 복음서 제6장에서 발췌하고 있다. 그리고 나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 말씀을 또한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하고 있다.(각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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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5)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lectionary4mas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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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가 관찰하게 되었던 전례력 상의 연중 주일 복음 말씀들의 배치에 대한 이 구조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마음에 그림으로 그리면서 상상해 보도록 하자: 가해 연중시기, 나해 연중시기, 그리고 다해 연중시기를 나타내는 ‘세 개의 깃발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이 세 개의 깃발들은 연중 제2주일들의 요한 복음서 말씀들이 마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여, 그리 길지 않은, ‘수평의 나무 막대기’를 통하여 서로 연결이 되어 있으며, 이들 말씀들을 연결하는, 이 ‘수평의 나무 막대기’의 한 가운데를 한 개의 ‘수직의 긴 나무 막대기’가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도록 하라(따라서 이들 수평, 수직의 나무 막대기들은 결합하여 십자가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깃발들을 그리 길지 않은 ‘수평의 나무 막대기’를 통하여 지탱하고 있는 ‘수직의 긴 나무 막대기’에는, 나해 연중 제2주일 복음 말씀 및 나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 말씀이 대칭적으로 묶여있으며, 이 깃발의 거의 중앙부에 요한 복음서 제6장 말씀들이 또한 5주에 걸쳐 연속으로 새겨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도록 하라.

 

이 모습은,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 말씀들 중에서 하느님과의 새 계약(The New Covenant)에 대한 정수를 담고 있는, 인류 구원을 위한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기에 매우 중요한 내용인,(각주6) 요한 복음서 제6장 말씀들이 가운데 깃발의 중앙부에 참으로 아름답게 가지런히 위치하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의 다른 말씀들이 이 가운데 깃발 상의 위와 아래, 그리고 양 옆의 두 깃발들에 새겨져, 가운데 깃발의 중앙부에 새겨진 이 요한 복음서 제6장 말씀들을, 마치 한 마리의 학이 알을 품고 있듯이, 마치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의 아들을 품에 안고 계시는 듯, 둘러싸고 있으면서 잘 보호하고 지키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구조이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설명을 그림으로 그려보도록 하라. 이런 매우 특별한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혹은 어떠한 신학적 고려 끝에 이렇게 마련이 된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엮은이도 현재까지는 들어 본 바가 없기에 향후 더 확인을 할 생각이나, 본 해설서 시리즈의 집필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된, ‘이 세 개의 깃발들’이 생동감 있게 힘차게 펄럭이고 있는, 높이 들어 올려진 ‘이 특별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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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6) 예를 들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인 1991년에 독일어로 저술하셨던 책의 영문 번역본인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라:
Called To Communion, Understanding The Church Today, Joseph Cardinal Ratzinger, 1996, Ignatius Press, San Franc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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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연중시기 전례력은 그 신학적 구조에 있어 요한 복음서 제6장 말씀들의 중요성을(각주7), 율법(The Law)과 동서고금의 황금율(The Golden Rule)을 새 계약(The New Covenant) 안에서 완성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으로써 제정하신, 향주 삼덕들 중의 으뜸 덕목으로서 모든 계명들의 으뜸 계명인 ‘사랑(charity)이라는 새 계명’의 첫 부분인 ‘믿는 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한 덕목들, 즉 인간에 대한 덕목[human virtues, 윤리덕(倫理德), 대인덕(對人德), 자연덕(自然德)]들의 기본 덕목들인 사추덕(四樞德, 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으뜸 덕목인 정의(justice, 의로움)의 첫 부분인 ‘믿는 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정의’, 즉 ‘경신덕(敬神德, the virtue of religion)’의 드러남인, 미사성제(각주8) 안에서 진실로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천주흠숭 말씀 전례에 합당한 형이상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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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7) 다음의 엮은이의 졸글의 후반부에 있는, ‘빵 증식의 기적(안병철 신부)’에 관한 글을 또한 잘 읽어 보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2.htm

(각주8) 이 경신례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 제381항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 1807항 및 제1836항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교회의 정의(justice)인 ‘경신덕(敬神德, the virtue of religion)’의 드러남임을 상기하라. 정의(justice, righteousness)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본 해설서 시리즈의 나해-II 연중 제17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에 있으니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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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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