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인성이냐? 신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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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4-24 ㅣ No.689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럼 문제가 무엇이냐.

 

문제의 제기는 이러한 예수님의 본성 중에서도 교회가 신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인간과 하느님사이의 이질감을 가져왔고 성속이원론으로써 사회에 무관심한 교회를 정당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주로 인권문제나 사회현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제 3세계 국가의 교회에서 나온 것이지만 요즘에는 전 교회에 걸쳐 제기되는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쇄신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사안입니다.

 

때문에 문제의 제기에 대한 대안으로 이분들이 내세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잊혀졌던 인성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제도교회가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낸 저 멀리에 계시는 거룩하기만 하고 두렵기만 예수님을 우리의 친구, 우리와 같은 인간예수를 찾아냄으로써 인간과 더욱 긴밀한 친밀감을 갖는 예수님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와 예수님이 현실세계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되어 신자들이 감소하고 있는(특히 젊은이들) 세계교회에 선교의 차원에서의 다루어지는 대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동안 예수님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것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이 반대급부의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미 밝혔듯이 예수님은 하느님만이 아니시고, 인간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 안에서 묵상이 되어야 할 분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 한쪽에만 치우쳤던 교회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인성을 강조하는 요즘 신학의 문제점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너무 높이 올렸다면 이젠 요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너무 많이 끌어내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성염교수의 글도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성염교수께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분은 신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려고 그런 글을 쓰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믿고 싶습니다.) 그분이 주장하시려고 하신 것은 그분의 인성에 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분의 주장은 정창욱형제님께서 일목요연하게 지적해 주신 것처럼 예수님을 너무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에 관해서 인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성으로 나가려는 묵상을 하시려고 하셨던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성서모임에서 하고 있다는 이러한 묵상법은 자칫 예수님께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 많습니다. 인간으로써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묵상하는 것이 더 손쉬운 것일테고 그러다 보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접어두고 오직 개인의 주관적인 성향과 경험 안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예수님을 탄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인간적으로 쉬운 묵상법에 길들여진 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으로의 묵상길을 가로막습니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묵상 안에서 오직 예수님은 인성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제대로 찾아낸다면 매우 은총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개똥신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만의 예수님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오직 인간적인 잣대로 묵상한 성서는 철저히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해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인성만이 표현된 것이나 신성만이 홀로 표현된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곳이면 어디나 인성이 함께 있으며 인성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신성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예수님의 세례장면에서도 예수님의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도 함께 존재함을 우리는 묵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묵상 중에 인성만을 묵상한다거나 신성만을 묵상한다는 것은 반쪽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며 이는 신앙생활의 불균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당에서의 신앙생활만이 중요하고 사회정의 활동은 부차적인 것이다.’라는 생각, 아니면 사회정의, 이웃봉사는 열심히 하면서도 기도나 신심생활은 뒷전인 생활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성서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 두 가지의 본성을 함께 묵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다면 인간인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의 신성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묵상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신성에 일치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묵상한다거나 예수님의 신성과 함께 하려는 완덕을 쌓는데 너무 인간적인 나약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너무 멀리 계시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며 자신의 나약함을 "교회가 예수님을 너무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우리가 신성보다는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그분의 인성을 본받는 것에서 예수님을 찾으려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그것이 나쁘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결코 인성만으론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성과 신성은 언제나 함께 묵상하여야만 된 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의 실수를 또 다른 각도에서 재현시키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성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묵상을 한다는 것은 묵상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이나 신학을 내세우는 분들이 요즘 많은 것 같습니다. 성염교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의 신성을 아예 부정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닌 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소위 "새로운 신학"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교회에서 멀어져간 현대인들이 복음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명분아래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 안에는 예수님의 기적은 없고 과학적으로 해석될 뿐이며 삼위와 인간의 사랑보다는 오직 인간의 사랑만이 절대가치로 부상하고 있으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은 공공연하게 부인되고 오직 인성만이 덩그러니 남겨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노력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것을 포기한 채 예수님을 끌어내려 놓고서는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다!"라고 말들하죠. 그들이 인간예수라고 지칭하는 그분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인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겨드리지만, 저는 이러한 교회의 정황 속에서 성염교수의 기고는 분명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비록 그분의 영성 안에서 이미 예수님의 신성을 묵상한 후 인성을 강조한 글을 발표하였다 하더라도 그 행동은 분명 경솔한 행동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교회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잘못 이해하는 신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타종교인들이 들으면 아예 오해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인권회 위원이며 교수이고 많은 교회서적을 번역하신 교회의 지도자급 되시는 분께서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지금은 그 반향이 미비할 지라도 교회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가늠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신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오직 인간이었다."라고 글이라든지 말로써 직접 표현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해석으로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 역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강한 긍정 속에 부정에 숨어 있게 되는 것이죠. 저는 성염교수의 글이 예수님의 신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기에 저는 여기에 대해선 삼가 하려고 합니다. 어찌 제가 그분의 영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염교수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토 전서에 보면 신자들이 바오로사도에게 이교도의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어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사도의 대답은 한 마디로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지식이 있다는 여러분이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용기를 얻어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여러분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식이 깨어있다는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간혹 교만함으로 이웃에게 의도하지 않은 그릇된 표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다 알고 있으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에 벗어남이 없는 자유로운 해동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앙에는 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에 의해 다른 이웃들의 신앙은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성염교수는 직접적인 신성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 지도자로써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했을 이 덕목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고린1 8,1-13) 바로 지식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성염교수께서는 그분의 표현대로 자신이 "퍼뜩" 깨달은 지식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비록 자신의 새로운 지식을 알렸겠지만 반면에 많은 이웃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신자로써 그런 글을 보고 시정을 원한다거나 입장을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우리의 의무이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성염교수 뿐만 아니라 요즘 새로운 신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거나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많은 신학자들께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은 뗄 수 없는 그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르침 속에서 이 진리를 치우심 없이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적인 자리에서 교리에 깊지 않는 일반대중에 선포할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염교수께서 쓰신 기사에 대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분도 계시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마치 동경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는 그러한 논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죠. 서강대학 철학과는 바로 그런 위치입니다. 그리고 천주교 인권위원회도, 우리 신학연구소라는 명함도 그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성서의 해석은 오직 교도권에 위임되어 있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해석하는 자가 바로 교도권입니다. 씁슬합니다. 만약 묵상 안에서 어떠한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셨다면 그것이 교회의 교도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되물어 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가차없이 버리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유익할 것입니다. 일반대중이 성서를 맞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에 비해 지금의 신자들은 매우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주신 은총만큼 성서를 소중하게 아끼고 지키고 사랑해야 하는 책임은 그만큼 큰 것입니다. 때문에 성서를 맞이할 때 두려움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모임에서든지, 가정에서의 묵상 속에서 성서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비록 성서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랑 넘치는 약속의 언어라고 할지라도 그와 함께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성서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할 때 우리는 성서에 경외감을 가질 것이나 두려움 없는 신앙은 인간적인 교만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 전에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인성을 취하신 이유는 우리와 친구가 되시려는 것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굳이 하느님과 동등함을 유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나약한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낮추신 사랑 많으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약한 인성 안에서 동질감을 찾아내어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그분의 신성을 본받는 것일 것입니다. 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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