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성당 게시판

국화빵을 사먹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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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아 [clara16] 쪽지 캡슐

2000-01-18 ㅣ No.264

국화빵을 사먹는 이유....

 

강추위가 몰아친 며칠 전 저녁, 퇴근길에 국화빵 천원어치를 사서 집으로

들고 들어가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작년 늦가을에 국화빵을 굽는 초라한

노점하나가 집앞 횡단로 부근에 들어섰는데, 나는 늘 무심히 그냥 지나쳐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비닐포장 사이로 국화빵을 먹고 있는 초라한 주인 사내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아. 저녁 대신 자기가 구운 국화빵을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비닐포장을 밀치고 들어갔다. 사내는 내가 들어

서자마자 먹고 있던 국화빵을 얼른 입속으로 넣어버렸다.

 

나는 국화빵 천원어치를 달라고 하고는 안경 낀 사내의 얼굴을 힐끔 쳐다

보았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사내는 머리가 희끗한 게 나이가 쉰쯤 되어 보였

으며 얼핏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사내는 추위에 손이 곱았는지 국화빵을

하나씩 더듬더듬 끄집어 내어 종이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종이 봉지에

담기는 국화빵이 꼭 사내의 눈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국화빵을 들어낸 빵틀의

빈자리 또한 사내의 눈물자국처럼 보였다.

 

사내는 왜 머리가 허연 나이가 되어 국화빵 장사를 시작한 것일까. 하루에

국화빵 100개를 팔아야 고작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지는데 도대체 하루에

국화빵을 몇 개나 파는 것일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사내가 구운 국화빵을 먹으며 새삼 삶의 엄숙성을 생각

했다. 팔기 위해 구운 국화빵이 팔리지 않아 빵을 구운 사내가 그 빵으로

저녁을 때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생각

되었다.

 

우리는 신년 벽두부터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빙자해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풍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떠들어대었다. 광화문 교보빌딩

옥상에 풍선으로 만든 우주선을 내려앉게 하고, 우주인이 내려온다고 떠들어

대었지만, 사실 오늘 우리의 삶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축제에 들떠 있기에는

너무나 심각하다.

 

아이엠에프 상황이 극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늘어가는 것이 거리의 노점

이다. 지하철 입구를 노점상이 거의 3분의 1이나 가로막고 있어 어떤 때는

다니기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이제 노점상들이 파는 물건이나 먹거리를 마냥

외면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나는 이제 거리에서

파는 음식들, 중국식 호떡이나 붕어빵, 잉어빵, 오뎅, 만두, 호두과자 등을

가끔 사먹는다.

그것이 빈곤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정호승 시인.

 

한겨레 신문에 실렸던 글이구요,

황금잉어빵을 무지 먹고싶은 영아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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