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하여 capital [성경공부] [성경해석] [칠죄종] 782_ 1077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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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 1/4 [110.14.3.*] 2011-07-07 ㅣ No.1077 가톨릭 성경 해석에 관한 글 모음: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 + 찬미 예수님!
이번 글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이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약간 깊이있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배경은 다음의 납득할 수 없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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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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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을 읽고서,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극단적인 그리고 과격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를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가톨릭 교회의 교계제도에 기인하는, 가톨릭 교회의 문헌들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교회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자가, 당시의 시기 및 이어지는 중세에 있어서의 성경 해석의 방법을 전혀 모르는, 자신의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왜곡/음해/훼손에 대한 보통 수준의 독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도와드리기 위하여 마련한 글이므로,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실 것을 권고합니다. 링크 설정된 글들을 또한 꼭 읽으실 것을 권고합니다.
1.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역대 교황님들 중에서 "대 교황(Pope the Great)"로 불리는 분들이 단 세 분 계시는데, 이들은 성 레오 1세 대 교황님,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 그리고 성 니콜라오 1세 대 교황님입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에서 권고하고 있는 성경 본문의 네 가지 의미들이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들을 학습하도록 합시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영어 CCC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1: http://ch.catholic.or.kr/pundang/4/c115.htm (우리말 CCC 제115항)
출처2: http://ch.catholic.or.kr/pundang/4/va_c115.htm (영어 CCC 제115항) The senses of Scripture
성경의 의미 115 According to an ancient tradition, one can distinguish between two senses of Scripture: the literal and the spiritual, the latter being subdivided into the allegorical, moral and anagogical senses. the profound concordance of the four senses guarantees all its richness to the living reading of Scripture in the Church.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16 The literal sense is the meaning conveyed by the words of Scripture and discovered by exegesis, following the rules of sound interpretation: "All other senses of Sacred Scripture are based on the literal."83
116 자구적 의미
자구적 의미는 성경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올바른 해석 원칙에 따른 주석으로 밝혀 낸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90) 117 The spiritual sense. Thanks to the unity of God's plan, not only the text of Scripture but also the realities and events about which it speaks can be signs.
1. the allegorical sense. We can acquire a more profound understanding of events by recognizing their significance in Christ; thus the crossing of the Red Sea is a sign or type of Christ's victory and also of Christian Baptism.84
2. the moral sense. the events reported in Scripture ought to lead us to act justly. As St. Paul says, they were written "for our instruction".85
3. the anagogical sense (Greek: anagoge, "leading"). We can view realities and events in terms of their eternal significance, leading us toward our true homeland: thus the Church on earth is a sign of the heavenly Jerusalem.86
117 영성적 의미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성경 본문뿐 아니라, 그 본문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도 표징이 될 수 있다. 1. 우의적 의미. 사건들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으로써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며, 그로 말미암아 세례의 표징이 된다. 91)
2. 도덕적 의미. 성경이 전하는 사건들은 우리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 사건들은‘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1코린 10,11 참조) 기록된 것이다. 92)
3. 신비적 의미(anagogia).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는(그리스 말 anagoge는‘위로’ 라는 뜻의 ana와, ‘인도하다’ 는 뜻의 agoge의 합성어이다.) 영원의 의미에서 실재와 사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징이다. 93)
118 A medieval couplet summarizes the significance of the four senses:
The Letter speaks of deeds; Allegory to faith;
The Moral how to act; Anagogy our destiny.87 118 중세의 한 이행시(二行詩)는 이러한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 94) 119 "It is the task of exegetes to work, according to these rules, towards a better understanding and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Sacred Scripture in order that their research may help the Church to form a firmer judgement. For, of course, all that has been said about the manner of interpreting Scripture is ultimately subject to the judgement of the Church which exercises the divinely conferred commission and ministry of watching over and interpreting the Word of God."88
But I would not believe in the Gospel,
had not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Church already moved me.89
119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95)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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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St. Thomas Aquinas, S Th I, 1, 10, ad I. 84 Cf. I Cor 10:2. 85 I Cor 10:11; cf. ⇒ Heb 3:1 - ⇒ 4:11. 86 Cf. ⇒ Rev 21:1 - ⇒ 22:5. 87 Le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88 DV 12 # 3. 89 St.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5, 6: PL 42, 176. 9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 1, q. 1, a. 10, ad 1: Ed. Leon. 4, 25.
91). 1코린 10,2 참조. 92). 히브 3,1`─`4,11 참조. 93). 묵시 21,1`─`22,5 참조. 94).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I: A. Walz 편: Angelicum 6(1929), 256. 95). 계시 헌장, 12항. 96).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 서간 반박」 , 5, 6: CSEL 25, 197(PL 42, 176). ----- 건의 사항: 위에 나열한 3가지의 영성적 의미(영성적 어의)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도덕적 의미” 대신에 “윤리적 어의”, “신비적 의미” 대신에 “종말론적/신비적 어의”.
특히 다음의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anagogical 단어의 설명 및 다음의 Henri de Lubac 추기경의 가르침을 담은 저서에 주어진 anagogical sense의 설명에 의하면, “anagogical sense”를 “종말론적/신비적 어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는 “anagogical sense"이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신비적 의미” 와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종말론적 의미” 둘 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 of, exemplifying, or based on anagoge ; specifically : having a spiritual meaning or a sense referring to the heavenly life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참고 사항: 사실 Henri de Lubac 추기경은, 20세기 중반에, 가톨릭 계약 신학을 재 발굴한 신학자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 말씀(Dei Verbum)",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 있어, 성경에 대한 섹션(CCC 제101-141항)을 통합한(consolidated)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 해당 구절의 인터넷 주소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신학대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Reply to Objection 1. The multiplicity of these senses does not produce equivocation or any other kind of multiplicity, seeing that these senses are not multiplied because one word signifies several things, but because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can be themselves types of other things. Thus in Holy Writ no confusion results, for all the senses are founded on one — the literal — from which alone can any argument be drawn, and not from those intended in allegory, as Augustine says (Epis. 48). Nevertheless, nothing of Holy Scripture perishes on account of this, since nothing necessary to faith is contained under the spiritual sense which is not elsewhere put forward by the Scripture in its literal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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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을 다루고 있는 개괄 논문(survey paper)(저자: John F. Boyle)입니다. 이 논문은 성경의 의미를 위에서처럼 네 가지로 나눈 신학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시대인 13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그에 의하여 성경 본문의 의미가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가 되는, 여러 가지의 성경 해석법들이 알려져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3.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은 당시에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the spiritual sense, 영성적 의미)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119항의 용어들에 따르면, 특히 우의적 어의(寓意的 語義)(the allegorical sense, 우의적/풍유적 의미) 및 신비적/종말론적 어의(the anagogical sense)를 추구하는 성경 해석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셨습니다.
3-1. 성경 본문에 대한 영성적 어의(영성적 의미)의 기초가 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자구적 어의(자구적 의미)는, 특히 지역 언어로 번역을 할 때에, 그 어의(의미)를 번역 대본에 있는 그대로의 의미의 보존을 위하여, 직역 번역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6항의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3-2. 일반적으로 영성적 어의는 자구적 어의의 추상화 작업을 통하여 추출될 것이며, 바로 이 추상화 과정은, 그 수준에 따라, 우의적/풍유적 어의, 윤리적 어의, 그리고 최종적 수준으로서, 신비적/종말론적 어의를 추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3-3. 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라고 말하였듯이,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는 당연히 성경 본문의 자구적 어의에 근거하여, 그 수준에 따라, 5W1H 원칙들로 불리는 것들, 즉 언제(when), 누가(who),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 를 점진적으로 제거 혹은 약화 시키는 추상화 과정, 달리 말하여, 해석 과정을 거쳐, 서서히, 우의적/풍유적 어의, 윤리적 어의,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비적/종말론적 어의를 추출하게 될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이러한 추상화 과정 혹은 해석 과정을 거쳐 성경 본문의 영성적 어의를 추출한 바를 기록한 가톨릭 교회의 어떤 자료 A를, 만약에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바로 그 잣대들과 기준들만으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설사 아무리 충실하고 엄정하게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잣대들과 기준들을 적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자료 A는 이미 그러한 잣대들과 기준들을 적용할 수 없는 추상화된 자료이므로, 이 자료 A로부터 자구적 어의를 추출 할 때에 사용하는 바로 그 잣대들과 기준들의 기계적인 적용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잘해야 틀림없이 오해뿐일 것입니다.
4.
이제, 위의 제3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지지하는 혹은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들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4-1.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자료로부터 발췌한 자료입니다. 여기서 그레고리오(Gregory)는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을 말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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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이 글의 저자인 Deeana Klepper는 미국의 보스톤 대학교(Boston University) 종교학과 교수(전공분야: 종교 및 역사)이며, 이 글은 이 교수가 강의하는 학부 2학년 과목(과목 명칭: Christianity, 강좌번호: CAS RN 212)에서 학생들에게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는 자료로 파악됩니다. ----- Biblical Exgesis, According to Gregory the Great and a Short Biographical Sketch그레고리오 대 교황 및 짧은 서지학적 대요에 따른, 성경 해석
(앞 부분 생략) Gregory's writings are diverse: sermons, saints lives, interpretation of scripture (or exegesis) and letters, a guide for priests and bishops exercising "Pastoral Care." They have enjoyed a great and lasting popularity, and were among the most read and quoted texts during the entire Middle Ages. His writings were not so much concerned with speculative questions regarding such things as the nature of Christ or the Trinity, but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providing models and instructions for how monks, priests and lay people can live a life of integrity and community that embodied the spirit and intentions of the gospel message. In his Pastoral Care, Gregory instructed priests on the duties of their ministry, composing a kind of Benedictine rule for the secular clergy (i.e. those living in the world). In his Dialogues, he recounted the lives of the holy men of Italy, including St. Benedict. He also wrote an extensive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called the Moralia in Job (see following selection). Here we see how thoroughly symbolic Gregory's approach to the Bible was, a mental disposition which determined not only how he read the Bible, but how he read the whole world. Words and things were for Gregory primarily important insofar as they pointed to other, supernatural, ideas and meanings.
그레고리오의 저술들은 다음과 같이 다양합니다: 설교들, 성인들의 삶들, 성경의 해석 (혹은 성경 해석) 그리고 “목자의 보살핌”을 행사하는 사제들과 주교들을 위한 안내(a guide)인 서신들. 그의 저술들은 커다란 그리고 지속하는 인기를 누렸으며, 그리하여 전체 중세 시기 동안에 가장 많이 읽히고 그리고 인용된 교과서(texts)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의 저술들은 그리스도의 본성 혹은 성삼위 등과 같은 것들에 관한 사변적인 질문들과 그리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그러나 수사(monks)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어떻게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위한 그리고 복음 메시지의 영성과 의도들을 구체화하였던 공동체를 위한, 귀감(models)들 및 가르침(instructions)들을 제공하는 데에 주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저술인] Pastoral Care에서, 그레고리오는, 세속의 성직자들[즉, (수도원 밖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직자들]을 위한 일종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칙을 작성함으로써, 사제들을 그들의 사역 임무들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저술인] Dialogues에서, 그는, 성 베내딕토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출신의 거룩한 사람들의 삶들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Moralia in Job 으로 불리는 (뒤따르는 발췌를 보라), 욥기(the Book of Job)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여기 이 주석서에서 우리는, 그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이 세상 전체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결정하였던 마음의 성향인, 그레고리오의 성경으로의 접근(approach)이 얼마나 전적으로 상징적(symbolic)이었는지를 봅니다. 단어(words)들과 사물(things)들은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그들이, 다른, 초자연적, 개념들과 의미들을 가리키는 한, 주되게 중요하였습니다.
Gregory's world view and imagination was profoundly symbolic or allegorical, in the sense that he was always looking for the "other meaning" or the non-literal meaning of events, words and things. Allegory means to say one thing and mean another. The term allegory derives from the Greek words alles (other) and agoreuein (to speak publically or openly, and refers to ordinary language and our ordinary use of language to communicate with the obvious and literal meanings of words). Allegory is another way of speaking and another way of meaning. For Gregory God spoke allegorically, using the concrete words of the Bible or the ordinary events and objects of our material existence to communicate another level of meaning beyond the literal and concrete. Any word or passage in the Bible might then have several levels of meaning, and it was up to the reader to decipher these. For example, to say "Christ entered Jerusalem," could mean just that, AND could mean the soul enters the spiritual realm. Gregory was most interested in the non-literal meaning of texts and events.
그레고리오(Gregory)의 세상에 대한 견해와 상상은, 그가 사건들, 표현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그밖의 의미" 혹은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를 항상 찾았다는 점에 있어, 대단히 상징적(symbolic) 혹은 우의적(allegorical)이었습니다. 우의(寓意, allegory, 풍유)는 한 개의 사물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의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단어들인 allens(그밖의, other)와 groreuein [공개적으로 혹은 개방적으로 말을 함, 그리하여 단어(words)들의 자명한 그리고 자구적 의미들로써 나누어 주기 위하여(to communicate) 일상적인 언어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사용을 언급함]로부터 유래합니다. 우의/풍유는 말하기의 다른 방식이며 그리고 의미하기의 다른 방식입니다.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자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의 다른 수준을 나누어 주시기(to communicate) 성경의 혹은 우리의 질료적 존재의 일상적 사건들 및 대상들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시면서, 우의/풍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있어 어떤 단어 혹은 구절은 의미함에 있어 여러 수준들을 가지며, 그리하여 이들을 해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는 바로 그것을 뜻할 수 있으며, 그리고 영혼이 영적인 영역에 들어감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본문들과 사건들의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에 가장 흥미를 가졌습니다.
In a dedicatory letter prefixed in the Moralia, Gregory explained his methods of Biblical interpretation. He distinguished three kinds of meaning which could be sought and, often, had to be sought from Scripture. These were the literal, the allegorical and the moral. The moral level referred to what a given passage might indicate that we should do, or how we should live. To Gregory the allegorical meaning included reference to spiritual truth or experience, to the Kingdom of God, to heaven, to eschatology or the final end of all things, to Christ or to all things concerning the life of church communities. Other Biblical readers and commentators broke Gregory's category of the allegorical into two separate levels: 1) the "anagogical," which meant the mystical or prophetic or eschatological and 2) the allegorical which referred to Christ and the "body of Christ" (understood as all believers, the life of all churches), to christological and ecclesiastical doctrine. Those who assigned four levels of meaning to the Bible (eg. John Cassian ca. 360-435) were simply making an additional distinction within Gregory's category of the allegorical level of meaning or reference.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에 의한 욥기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인] Moralia에 표제로 붙여진 헌정 서한(a dedicatory letter)에서, 그레고리오는 성경의 해석에 대한 자신의 방법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었던, 그리고, 자주, 찾아져야만 하였던 의미에 있어서의 세 가지 종류들을 구분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구적 의미, 우의적/풍유적 의미 그리고 윤리적 의미였습니다. 윤리적 수준은 어떤 주어진 구절이 우리가 행하여야만 하는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나타낼 수 있을 바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우의적/풍유적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대한, 하늘(heaven)에 대한, 종말론 혹은 모든 사물들의 최종적 끝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혹은 교회 공동체들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영적인 진리 혹은 경험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였습니다. 다른 성경 독자들 및 주석자들은 우의적/풍유적 의미라는 그레고리오의 범주를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분리된 수준들로 쪼갰습니다: 1) 신비적 혹은 예언적 혹은 종말론적 의미를 뜻하는 "신비적/종말론적 의미(the anagogical)" 그리고 2)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이들, 모든 교회들의 삶인)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하여, 그리스도론적 및 교회론적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는 우의적/풍유적 의미(the allegorical). 성경에 대하여 의미에 있어서의 네 수준들을 할당하였던 자들은[예를 들어, 성 요한 카시아노(John Cassian, 360-435년경)] 의미(meaning) 혹은 언급(reference)에 있어서의 그레고리오의 우의적/풍유적 수준이라는 범주 안쪽에서 단순히 어떤 추가적 구분을 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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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was indebted for his methods primarily to St. Augustine and to the great Greek theologian and exegete Origen. We read, for example, how Augustine in Book 6, chapter IV of the Confessions, credits Ambrose for helping to show him how to discover the life-giving meaning or "spirit" behind the literal meaning or "letter" of Biblical, especially Old Testament texts: "And [Ambrose] would go on to draw aside the veil of mystery and lay open the spiritual meaning of things which taken literally would have seemed to teach falsehood." Augustine then understood that everything in the Bible was there for our edification and that when one encountered a text that on the literal level seemed unedifying, absurd or not to support Christian teaching, the job of the reader or interpreter was to find a way to make them useful to faith by figurative or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e Bible communicated the truth: the reader's job was then to figure out in what sense or at what level of meaning a given text was true. Augustine puts forth his interpretive or hermenutical principles in his works On Christian Doctrine and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Gregory developed and demonstrated, with a great and tireless imagination, Augustine's principles of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his Moralia. The Moralia was intensively studied in the Middle Ages as a model of interpretation and thinking.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방법들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게서 그리고 위대한 그리스의 신학자이며 그리고 성경 해석자인 오리제네스(Origen)에게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저서인] 고백들(the Confessions)의 Book 6, chapter IV 에서, 성경의, 특별히 구약 성경 본문들의 자구적 의미 혹은 “글자” 뒤에 있는 생명을 주는 의미 혹은 “영(spirit)”을 어떻게 발견하는지를 그가 보여주는 것을 도와준 데에 대한 공적이 어떻게 암브로시오(Amprose)에 있다고 간주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는] 신비의 베일(veil of mystery)을 한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그리하여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거짓을 가르치는 것 같았을 사물들의 영성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계속하곤 했었습니다.” 그 위에(then)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교화(敎化, edification)를 위하여 거기에 있음을 이해하였으며 그리고 어떤 이가 자구적 수준에서 비 교화적이고, 모순되거나 혹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는 어떤 본문을 직면한다면, 독자 혹은 해석자의 임무가 표상적(figurative) 혹은 우의적/풍유적(allegorical) 해석에 의하여 그들이 믿음에 유익하도록 만드는 어떤 방식을 찾아내는 것임을 이해하였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communicated): 따라서 독자의 임무는 어떤 의미에 있어 혹은 뜻의 어떤 수준에 있어 주어진 본문이 참인 것인지를 생각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e)는 자신의 저술들인 On Christian Doctrine 및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에서 자신의 해석적(interpretive) 혹은 성서 해석적(hermenutical) 원칙들을 제시합니다.(*) 그레고리오는 우의적/풍유적 해석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원칙들을 [자신의 저서인] Moralia 에서, 커다란 그리고 지치지 않는 상상과 함께, 발전시켰으며 그리고 예증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인] Moralia 는 중세에 있어 해석과 사유(thinking)의 어떤 귀감(a model)으로서 집중적으로 학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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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hyme survives from the Middle Ages that seems to have been designed to help monks, preachers and students remember the four level of meaning outlined by Cassian, Augustine and Gregory:
중세로부터, 수사(monks)들, 설교가들 그리고 학생들이, 카시아노(Cassian), 아우구스티노(Augustine) 그리고 그레고리오(Gregory)에 의하여 윤곽이 그려졌던, 의미에 있어서의 네 개의 수준들을 기억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고안되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한 개의 압운시(押韻詩)가 생존하고 있습니다:
Litera gesta docet, This verse, with some license, translates:
이 한 편의 시는, 어떤 승낙과 함께,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됩니다:
The letter shows us what God and our ancestors did;
글자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행했던 바를 보여주며,
(Robert M. Grant, A Short Histo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New York, 1963). More literally, the verse says: The letter instructs about what things were done; Allegory teaches us what we should believe; the moral level shows what to do; the anagogical signals aspects of the (spiritual and future) realm toward which we are directed. (뒷부분 생략) -----
4-2. 다음의 글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Dan Brown의 책인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에서 어떠한 왜곡/폄훼/훼손이 성 그레고리 1세 대교황에게,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가해지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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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 이 글은, 호주 멜보름에 기반을 둔(Melbourne-based) 가톨릭 저자, 저술가 및 강사인 John Young의 글입니다. 위의 제3항 및 제4-1항에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설명을 읽은 다음에 이 글을 읽으시면, 훨씬 더 쉽게,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The Da Vinci Code and the itching ears syndrome다빈치 코드와 몹시 듣고싶어하는 증후군
Brown's "discovery"브라운의 "발견"
The Church, he says, pretended Mary was a reformed prostitute, but scholars know this is wrong. This "discovery" will doubtless impress some readers, particularly those who have always assumed Mary was the woman who had a bad name in the town and who, repentant, washed the feet of Jesus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Readers may wonder: why weren't we told the truth? Brown's rejection of the error will dispose some of them to believe other claims he makes.
그는 교회가 마리아가 한 명의 개심한 창녀(a reformed prostitute)였다고 사칭하였다(pretended)고 말합니만,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부 독자들에게, 특히 마리아가 그 고을에서 어떤 나쁜 평판을 가졌으며 그리고, 뉘우치면서, 예수님의 발들을 씻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이들을 닦았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고 항상 가정해 왔던(have always assumed) 자들에게, 감명을 줄 것입니다. 독자들은 왜 이 진실이 우리에게 말해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의아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오류에 대한 브라운의 거부(rejection)는 그들 중의 일부로 하여금 그가 만드는 다른 주장들을 믿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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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itcombe.sbc.edu/davincicode/gregory-homily33.html (발췌문 인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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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then explained that the ointment used by Luke's unnamed sinner, now Mary Magdalen, to anoint Christ's feet had previously been used by her "to perfume her flesh in forbidden acts."
It was Gregory who also associated her, again primarily through identification with Luke's unnamed sinner, as a penitent when he explained that by immolating herself at the feet of Jesus, "she turned the mass of her crimes to virtues, in order to serve God entirely in penance."
Homily 33 is recorded in Homiliarum in evangelia, Lib. II, Patrologia Latina, vol. 76 (Paris: J.-P. Migne, 1844-1864), cols. 1238-1246 (이상 발췌문 인용 끝)
For he is right in maintaining that Mary Magdalene is not the penitent sinner of Luke 7. There is no good reason for saying they are the same person. This identification was apparently never made until late in the sixth century; and when St Luke names Mary Magdalene, after having written about the penitent woman, he seems to be introducing her for the first time. Most Scripture scholars see Mary Magdalene, Mary of Bethany and the penitent sinner as three different women.
이는, 마리아 막달레라(Mary Magdalene)가 루카 복음서 제7장의 회개하는 죄인이 아님을 주장함에 있어, 그가 올바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동일한 자라고 말하기 위한 타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러한 동일시(identification)는 6세기 말기까지 전혀 외관상으로(apparently)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성 루카가, 이 회개하는 여인에 관하여 이미 기록한 이후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거명할 때에,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소개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seems). 대다수의 성경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이 회개하는 죄인을 세 명의 다른 여인들로 생각합니다(see).
The identification was made by Pope Gregory the Great in a homily preached in 591 (Homily 33, PL 76, 1239). Did he do so to disparage her? Certainly not. He was always more interested in drawing spiritual lessons from Scripture than in adhering to the literal meaning. In this instance he viewed the seven demons cast out of Mary Magdalene as literally demons but also as representing the seven capital vices.
이 [비 자구적(non-literal)] 동일시는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에 의하여 591년에 설교되었던 한 개의 강론(Homily 33, PL 76, 1239)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그녀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자구적 의미를 고수하는 것보다, 영적인 교훈들을 도출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 그는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일곱 마귀들을 글자 그대로의 마귀들로 그러나 또한 칠죄종(the seven capital vices)(*)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vie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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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ccount of the penitent woman he sets in contrast the perfume with which she anointed Jesus with the perfume she would have previously worn when sinning; he sees her eyes which previously had coveted forbidden things as now filled with the tears of repentance; the hair which she had sinfully flaunted is now used to dry her tears; the mouth which had spoken proud words now kisses her Saviour's feet.
회개하는 여인의 이야기에 있어 그는 그녀가 예수님께 부어 발랐던 향유를 그녀가 이전에 죄를 지을 때에 몸에 발랐을 수 있는 향유와 대조적으로 설정하고, 그리고 그는 이전에 금지된 것들을 탐을 내었던(coveted) 그녀의 눈들을 이제 회개의 눈물들로 채워진 눈들로 보며, 그리고 그녀가 죄 많게 과시하였던 머리카락은 이제 그녀의 눈물들을 닦아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그리고 자만하는 말들을 하였던 입은 그녀의 구원자의 발들에 이제 입을 맞춥니다.
The homily doesn't lower Mary in the estimation of the hearers; it elevates her. It praises her for renouncing sin and turning so fully to Christ. Had Gregory wanted to downgrade her he would have adopted a very different approach.
이 강론은 청중들의 평판에 있어 마리아를 낮추지 않으며, 이 강론은 그녀를 들어올립니다. 이 강론은 죄를 포기하고 너무도 충만하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선 것에 대하여 그녀를 칭찬합니다. 만약에 그레고리오가 그녀를 격하시키는 것을 원하였더라면 그는 매우 다른 접근을 채택하였을 것입니다.
Some of Dan Brown's readers won't realise it, but Christians through the ages have always been moved by accounts of repentant sinners: Peter weeping bitterly for his denial of Jesus; the repentant thief on the cross (the thief who stole Heaven, as Fulton Sheen put it); Thomas renouncing his scepticism with his act of faith "My Lord and my God"; St Augustine breaking with years of sin to become a great saint.
댄 브라운(Dan Brown)의 독자들 중의 일부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세기들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회개하는 죄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의하여 항상 감동해 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부인 때문에 비통하게 눈물을 흘림; 그리고 (Fulton Sheen이 그렇게 표현하였듯이, 하늘을 훔쳤던 도둑인) 십자가 위에서의 회개하는 도둑, 그리고 토마스(Thomas)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복음서 20,28) 이라는 자신의 믿음의 행위와 함께 자신의 회의(scepticism)을 버림,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한 명의 위대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죄로 이루어진 여러 해들과의 결별함.
There ever resonates in the Christian soul the statement of Jesus,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Luke 15:7).
바로 거기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복음서 15,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울려퍼집니다.
Ignoring all this, Brown infers something sinister in Pope Gregory's identification of the two women: something is being covered up; the Pope knows it would be dangerous, indeed disastrous, if the truth got out - if people saw that Mary Magdalene, not St Peter, should have led the Church. So her character has to be blackened.
이러한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브라운(Brown)은 이 두 여인들에 대한 교황 그레고리오(Pope Gregory)의 [비 자구적(non-literal)] 동일시에 있어 악의를 품은 그 무엇을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infers): 무엇인가가 은폐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 교황은, 만약에 진실이 알려지게 되었더라면, 즉 만약에 사람들이, 성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가 교회를 이끌었어야만 함을 알아차렸더라면(saw), 그것은 위험할 것이며, 정말로 재앙이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품성은 어둡게 되어져야만 한다.
----- ... 그레고리오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자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의 다른 수준을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의 혹은 우리의 물질적 존재의 일상적 사건들 및 대상들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우의적/풍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있어 어떤 단어 혹은 구절은 의미함에 있어 여러 수준들을 가지며, 그리하여 이들을 해독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 그레고리오는 본문들과 사건들의 비 자구적 의미(non-literal meaning)에 가장 흥미를 가졌습니다.
According to Brown, speaking through his fictional characters, a great conspiracy is in place, and has been since early times, to prevent the truth becoming known. But there has also been a secret tradition which has preserved the truth through the centuries. A vast secret society, the Priory of Sion (whose great enemy is Opus Dei!) knows the truth. The Priory has numbered among its Grand Masters such illustrious figures as Botticelli, Leonardo da Vinci, Sir Isaac Newton and Victor Hugo.
브라운에 따라, 그의 소설의 등장 인물들을 통하여 말하면, 이 진실이 알려지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떤 커다란 음모가 적소에(in place) 있으며, 그리고 이 음모는 초기 시대들 이후로 있어 왔다. 그러나 세기들을 통하여 진실을 보존해 왔던 비밀의 전통이 또한 있어 왔다. [자신에 대한 커다란 적이 오푸스 데이(Opus Dei)인] 비밀 단체인 시온 소(小)수도원(the Priory of Sion)은 이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소(小)수도원은 그 원장들 중에 보티첼리(Botticelli),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아이작 뉴톤 경(Sir Isaac Newton) 그리고 빅토르 유고(Victor Hugo) 등과 같은 저명한 인사들을 하나씩 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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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so the story goes, couldn't reveal the facts because of the Church's power, so he left hidden messages in his paintings. In The Last Supper the figure taken to be St John, sitting at Jesus' right, is really Mary Magdalene!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진행하는데, 레오나르도(Leonardo)는, 교회의 힘 때문에, 진실들을 드러낼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들 안에 감추어진 메시지들을 남겼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에 있어,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성 요한으로 택해진 인물은, 실제로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이하 생략) ----------
4-3.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댄 브라운의 소설인 "다빈치 코드"가 허구의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오푸스 데이 홈페이지 제공의 글 전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푸스 데이에는 수사(수도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췌 시작) “다빈치 코드”다빈치 코드는 가톨릭 종교의 진실을 의심하는 픽션 소설로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소설이라 하지만 교회의 기초 자체를 비난하는 모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미국과 스페인 신문에 실린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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