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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1-01 ㅣ No.1615

하늘을 찌르는 가벼움!

 

진지한 구세대와 깃털 같은 신세대의 불안한 동거… 이 가벼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채팅 몇마디에 연애감정을…

 

 사이버 공간에서 청소년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야심한 시간대에 서너 시간 컴퓨터에 붙어 사는 게 중요한 하루 일과인 김아무개(15)군은 “미팅하는 것보다 채 팅해서 더 쉽게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96년부터 하이텔과 유니텔,인터넷 을 통해 심리상담을 해오고 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규환(43) 한마음신경정신과 원장은 신세대의 디지털 문화를 엿보면서 현실세계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훨씬 더 쉽게 서로에 대한 친화력을 얻는 점이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채팅에 들어서 면 자신의 실제 모습이 가려지므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 래서 평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도 과감한 성적 표현이나 노골적인 얘기를 하게 되 죠. 채팅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금세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채팅이 서먹서먹함을 빨리 가시게 하고 친밀감이 들게 하는 까닭은 화면에 뜨는 글자를 읽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라는 관찰도 있다.

 

사이버 문화의 확산은 십대들의 삶의 패턴을 바꿔놓고 있다. 이들은 최신 기종의 컴퓨터조차 “속도가 느려터져 지겹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파도 위에서 윈드서핑하듯 사이버 공간을 누비며 다닌다. 이들의 이런 모습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경박하고 깊이가 없다”고 공격한다.

 

2∼3년 전만 해도 통신 공간에 자주 들어갔던 회사원 김아무개(31)씨의 말. “십대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논쟁을 할 경우엔 특히 더하죠.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없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즉각 직설적인 욕이나 원초적인 표현을 내뱉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통신에 잘 들어가지 않아요.”

 

출판사에 근무하는 김아무개(37)씨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주로 이런 대화를 나눈다. “너 이거 어떻게 생각하니?” “좋아요.” “왜 좋니?” “몰라요.” 이런 대화는 십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주 겪는 일이다. 기성세대는 왜 좋은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기대하지만 십대들은 단답형으로 자기 느낌을 드러낼 뿐이다.

 

학교의 풍광도 달라지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고교생 기아무개(17)양은 선생님들이 “너희들은 미래가 없는 아이들 같다”는 ‘잔소리’가 지겹다. “으레 그러려니 하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게 상책이죠.” 교사가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해도 ‘안 가버리는’ 친구들이 더 많다.

 

 

“웃기지 못하면 실패한 강의”

 

중학교 교사인 김경옥(28)씨는 요즘 학생들에게서 ‘진득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피상적으로만 들어요. 수업을 빼먹고 체육대회 연습을 하자고 우기는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의 허락이 없어서 안 된다’고 꾸짖었더니,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오겠다며 교장실로 가는 바람에 황당했던 적도 있죠.”

 

연령대를 좀 높여 대학생들의 캠퍼스를 들여다봐도 기성세대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 눈에 띌 뿐이다. 군을 제대한 뒤 이번 가을 학기에 복학한 대학생 김호준(24)씨는 과 동료들의 속내와 고민을 자유롭게 적던 이른바 ‘잡기장’의 변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입대 전에 사회문제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잡기장이 제대 뒤에 보니 농담과 삼행시, 리포트에 관한 정보 등 신변잡기로 가득 찬 낙서장으로 변해 있었다. 200개가 넘던 학회도 반으로 줄었고 그조차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학기에 한두번 진행하는 세미나도 나로선 혼란스럽다. 누가 말실수라도 하면 그 꼬투리를 잡아 ‘농담 따먹기’ 시간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런 현상을 두고 기성세대는 “요즘 청소년들이 깊이가 없고 너무 가볍다”는 진단을 내린다. 과연 이런 진단은 정당할까.

 

사회가 너나없이 가벼워지고 있는데 신세대에게만 화살을 겨냥하는 것은 우선 정당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웃음 강박’에 걸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웃기는 이야기’ 속에 흘러가고 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웃기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60분 강의에 두번을 웃길 수 없으면 실패한 강의”라는 어느 대학원장의 자조섞인 말처럼, 교수의 강의나 학술 세미나에서조차 웃음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한마디 농담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

 

직장생활의 적재적소에서 농담 한마디로 긴장을 녹이는 사람은 업무능력에까지 보이지 않는 가산점을 얻는다. 입사 6년차인 삼성물산의 최아무개(31) 대리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경우다. 그는 매일 한두 시간을 투자해 인터넷과 신문을 뒤져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낸다. 최씨는 “한번의 실패가 불러일으킬 ‘썰렁한 파장’을 우려해, 검증받지 않은 농담의 경우 가까운 친구에게 시험적으로 구연해보고 평가받은 뒤에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터뜨리는” 눈물겨운 노력으로 오늘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회사 내 전산망이나 인터넷을 이용해 ‘촌스럽고 쑥스러운’ 안부편지 대신 인터넷에서 퍼올린 농담 한마디를 띄워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는 방식은 직장문화의 새로운 풍경이다.

 

전문가들은 사회 분위기가 가벼워지는 것을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어쩔 수 없는 경향으로 보기도 한다. 사회비평가 김규항씨는 “가볍다, 무겁다라는 이분법적 논리 자체가 구시대적”이라고 평한다. “우스갯소리가 늘어나고 젊은이들이 탈정치화한다는 것을 징표삼아 사회가 가벼워진다고 개탄하는 것은 낡은 정서로 다음 세대를 재단하는 행위다. 젊은이들이 가벼움 속에서 획득한 개인성과 일상성은 오히려 70∼80년대식의 경직된 사고를 가진 기성세대가 진지하게 배워야 할 점”이라고 충고한다.

 

우리 사회의 가벼움이 다양성의 통로가 아닌 또다른 획일주의로 흐를 위험을 경계하는 시선도 있다. 문화평론가 김용석씨는 “서구사회처럼 시민사회화의 경로를 수백년간 차근차근 밟지 못하고 후기 산업사회로 뛰어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가벼움이 ‘호들갑’으로 변질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농담과 토론이 상호보완하면서 공존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즐거움만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아직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진정한 열린 사회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말한다.

 

특히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젊은 세대를 ‘가볍다’거나 ‘깊이가 없다’고 재단하는 시각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황상민(37)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을 기성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대신 “정보 처리의 방식이 다르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컴퓨터, 영화, 대중음악 등 아이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는 전문가 뺨칠 정도로 깊이 빠져든다. 아이들이 가볍거나 깊이가 없다기보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의 관심사에만 빠져 있다고 보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특정 영역에는 전문가 이상으로 시시콜콜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관심없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제로에 가깝다. 이 때문에, 폭넓은 사회적 관심과 인문적 소양을 중시하던 기성세대의 눈에는 이들이 ‘가볍’고 ‘깊이없게’ 비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지 의사소통에 익숙한 세대

 

디지털 문화에 친숙한 십대들은 기성세대와 의사소통 방식조차 다르다. 기성세대가 문자를 통한 정보획득과 의사소통에 친숙한 세대라면 이들은 이미지를 통한 의사소통에 친숙한 세대이다. 가령 오늘의 십대들은 ‘아바타’(Avatar)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익숙하다. ‘분신’(分身)을 뜻하는 인도어에서 온 이 말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대리형상’을 가리킨다. 홈페이지에서 주인을 대신해 귀여운 인형 또는 요정의 모습으로 사이트맵을 안내하는 도우미의 형상 따위가 아바타의 좋은 예이다. 아바타라는 대리형상의 사용을 익숙하게 만든 것에는 머드 게임의 공이 크다. 머드 게임은 등장인물을 그래픽으로 표현하고, 게임하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의 등장인물과 동일시해 게임을 진행한다. 현재 ‘바람의 나라’, ‘쥬라기 공원’, ‘단군의 땅’ 등 18개의 상용 서비스가 컴퓨터통신을 통해 제공되고 있다.

 

십대들이 친숙한 것은 이처럼 이미지를 통한 의사소통이다. 존 슐러 미국 라이더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이미지를 통한 사고에 익숙해지면 문자적 사고는 힘들어진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고에 익숙한 십대들은 채팅할 때도 “컴퓨터 게임하듯 접근한다”. 이들은 “모니터에 보이는 단어들이나 아바타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사람을 보려 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마치 일종의 로봇이거나 게임의 표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부적절한 성적 표현을 쉽게 하는 것은 이런 심리에서 나온다.”

 

이미지를 통한 의사소통에 익숙해진 십대들과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만을 배운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황상민 교수는 “서로 코드가 다른 사고방식 사이의 의사소통은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과의 의사소통만큼이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외국인과 만났을 때 의사소통이 이뤄지려면 한쪽이 외국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듯, 세대간의 대화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대화하려면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 이미지 언어를 학습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얘기다.

 

 

신세대 문화를 배우는 길은

 

황 교수는 “이제는 학교 교육이 십대들에게 익숙한 이미지 중심의 의사소통을 겨냥해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하지만, 현재로선 그런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학교 교육을 개혁해야 할 주체들이 문자매체를 통한 정보획득과 의사소통에 갇혀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신세대에 대해 ‘가볍다’ ‘깊이가 없다’는 진단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세대간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반영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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