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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59.86.231.*]

2007-06-07 ㅣ No.5467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느낌은 존재에서 오는 것.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사랑은 '이다' 인 것.

 

   어미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아기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

   사랑을 고백했다가 협박당했다가 노여워했다가

   마음을 고쳐먹는 변덕스러운 아기에게서,

   인간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 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본다.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은 사랑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 '이시다'.

   사랑을 느끼게 해주신다.

   하느님이 사랑 '임' 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랑 '할' 수 있다.

   사랑 '한다' 말할 수 있다.

   사랑 '한다' 는 것은 사랑 '이다'의 표출이다.

 

   이제민 / 생활성서사 / <말은 시들지 않는다>에서

 

 

   에필로그 : 하느님은 사랑 '하지' 않으신다.......에서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로소 사랑 '할' 수 있다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인의 채념어린 며느리에 대한 용서, 심지어 살인마였던 유영철에게 90 노모와 60 아내와 30 3대 독자를 처참히 잃어야 했던 고정원 할아버지의 분노와 자살을 결심하려다 채념어린 용서를 만날 때, 지금 이 순간 독방에 홀로 갇힌채 유영철 마저 가톨릭 신자로 거듭나 역시 채념어린 용서의 하루를 보낼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통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함께하시는 주님이기에 비록 채념어린 용서일지라도 오늘 이 순간도 작전을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될 지라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전쟁의 논리도 초월하시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그 용서의 경계병으로서의 하루를 청원합니다.

 

내가 감히 주님의 용안을 배알하는 용서(얼굴容, 서로胥), 나는 어제 하루도 주님을 용서해 드리지 못하고 사람을 용서하려 했기에 그렇게 티격 태격 싸워야 했나봅니다. 심지어는 중간에 중재한다며 한쪽으로 기운다며 또 그사람들에게 과민한 모습으로 그렇게 싸워야 했나봅니다.

 

내가 왜 인간끼리 인간의 모습으로 서로 용서하려 하는지요? 아무튼 복잡합니다. 하지만 이 죄인을 주님께서 여전히 오롯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심을 믿기에 나는 주님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나아갑니다.

 

자신의 깊은 고독을 용서해야 하는 측은한 여인을 봅니다. 하늘에 함께하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세상속에서 묵묵히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피로한 장미꽃으로 지극히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러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내 마음의 깊은 고독을 용서하고자 잠시 자리를 이동합니다.

사랑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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