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1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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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1-26 ㅣ No.8642

 

아마도 모티터보다는 프린터해서 읽으시는 것이 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묵시록 제 1장은 머리말(1,1~3)과 편지의 인사(1,4~8) 그리고 인자에 관한 환시(1,9~20)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1. 머리말 (,1~3)

묵시록을 시작하는 첫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αποκαλυψιs Ιησου Χριστου) 인데, 계시(또는 묵시)를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apokalypsis [αποκαλυψιs]이다. 여기서 책의 제목이 유래되어 묵시록 혹은 계시록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성 예로니모 교부는 apokalypsis [αποκαλυψιs]라는 용어가 성서 저자들이 고유하게 사용하는 용어라고 지적한다. apokalypsis [αποκαλυψιs]라는 용어가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한하여 예로니모 교부가 지적한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 70인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계시하다’라는 의미의 apokalypto [αποκαλυπτω] 동사는 하느님의 현현(顯現 1사무 3,21)을 지칭하기 위해서 또는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아모 3,7)과 그분의 정의와 구원(이사 56,1; 시편 98,2)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구약성서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만,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라고 말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표현은 소유격 때문에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소유격을 목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신약성서에서 apokalypto [αποκαλυπτω] 라는 동사가 항시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계되는 최종적인 계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1고린 1,7~8; 2테살 1,7; 1베드 1,7.13). 이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구원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현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시록 본문에서 표명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구현된 것이다.

 

둘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소유격을 주어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주체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하신 것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복음이란 그 자체가 종말론적인 메시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들에게 특별히 미래의 설교가들에게 전해진 것은 오로지 계시를 통해서이다 (갈라 1,12.16; 로마 16,25; 에페 3,3). 갈라 1,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는 주체이시지만, 다른 본문들 속에서는 하느님이 계시의 주체가 되신다. 이 경우 구원사적 업적과 계시의 대상인 예수께서는 또한 종말의 시대를 여시는 분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계시의 예언적 성격은 반드시 구현된다는 필연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계시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계시의 객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묵시록을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묵시 1,1에서 관계 대명사로 이어지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계시의 내용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요한 묵시록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계시’란 용어는 구체적인 문학 유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적 목적 즉 교회와 세상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신비를 점증적으로 벗겨내는 목적이 있음을 지적해 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1절에서 볼 때, 계시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이 계시를 주셨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신비가 밝혀질 수 있고, 어둠이 빛이 될 수 있다. 이제 곧 밝혀지게 될 비밀들의 대상은 그분과 그분께서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시어 아버지로부터 들으신 것만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시는 분으로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계시의 수혜자이시기에 필연적으로 그 계시를 전해주시는 중재자인 것이다 (요한 5,30; 14,10; 17,8).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전해 받은 계시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일어나야만 할 일들”이다. 유다인의 묵시문학들은 필연성에 대한 사고를 무척 강조하고 있다 (다니 2,28). 유다인들이 갖고 있던 필연성에 대한 사고의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구상하고 계신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러한 계획들은 역사 안에서 필연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계획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세상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종결문이 시작되는 22,6에서는 1,1의 표현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것은 마치 예고된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묵시록이 전해주려는 계시는 1,1과 22,6을 근거로 해서 보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묵시 22,7에서는 “보라, 내가 곧 오겠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1,1과 22,6.7을 비교해 보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란 ‘내가 곧 오겠다’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요한 묵시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고, 그로부터 유래하는 격려의 내용만을 내포하고 있는 희망의 책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올 세계와 종말의 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 순종과 동참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때, 묵시록은 모든 독자들에게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퍼낼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이처럼 계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일곱 편지,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관한 내용들은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방식으로 육체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고 무질서의 처참한 상황을 체험하고 있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기술해 주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이 보여주는 해결책이란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으로 표출되고 있다. 나아가 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란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으로서 그분의 구원 계획이 결정적이고 총체적인 방식으로 구현되게 하는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 묵시록의 본문 속에 나타나는 파괴의 표상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표명해주는 것이지, 세상의 파국이나 멸망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신비의 실현이 분명 예수의 구원적 죽음이라 한다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란 그러한 죽음에 앞서는 상황 즉 기다림과 언약의 상황에 관계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곧’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장애물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정지시키거나 늦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신속성과 순간성을 지니는 것으로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가 성취될 날을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의 상황을 전해주는 요한 묵시록 본문의 맥락 속에서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라는 표현은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어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네 번째 나팔을 부는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째 천사의 소리가 들리는 날, 바로 그가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에, 하느님의 신비가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 곧 예언자들에게 기쁜소식으로 전하신 그대로 될 것이다” (묵시 10,7). 이 내용을 보면 방금 언급한 어감의 의미는 자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2,16; 3,3.11.20). 하지만 편지의 내용을 볼 때,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어감으로 담고 있기도 하다. 즉 ‘곧’이라는 표현은 ‘불시에’라는 사고를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공관 복음에서도 불시에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마태 24,43; 루가 12,39). 요한 묵시록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도둑처럼 ‘불시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3,3; 16,15).

 

 

당신 종들에게” (1,1)라는 표현은 계시의 수신자들이 하느님의 종들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지, 관중들이나 말 잘하는 연설가들이 아니다.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리기도 하고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노예’를 의미하는데,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이사 42,1에서 유래하는 메시아적 호칭이기도 하다. 묵시록 전체를 통해서 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묵시록에서는 이 호칭이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갈망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로 한 자들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특히 묵시록에서는 14번씩이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종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2,20; 7,3). 그러므로 지금 이루어지는 계시는 모든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앙인들이 종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의 실존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셨다.” (1,1)는 표현에서처럼 천사의 중재 행위는 22,6.16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역사에 대해서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전해주시는 계시는 한 천사의 중재를 통해 요한에게 전달되고 있다. 계시의 전달 과정이 1a에서는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 신앙인들(당신 종)이라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1b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의 수신자들인 하느님의 종들 사이에 다른 두 중재자인 요한과 천사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천사’라는 용어는 구약성서 초기 작품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좀 더 후대의 작품들, 특히 바빌론 유배 후(기원전 586~538)의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바빌론과 페르시아 사상(思想)에서 유래했으며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기간을 통하여 자기들 종교에 끌어들여 발전시켰으리라고 본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볼 때 너무나 위대하시고 인간의 사유능력으로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어떤 다리 역할을 해줄 만한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성서에서 천사의 위치가 확고부동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특히 묵시 문학서들 안에 이 천사의 개념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천사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구약 초기작품들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는 것으로 나타나다가 이런 현상은 차츰 줄어들었고, 구약 후기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즈가리야 예언서 등에 와서는 거의가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연결이 이루어진다(즈가 1,19 참조).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1,2)라는 표현과 문학적으로 유사한 표현은 1,9; 6,9; 12,17; 20,4 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란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요구와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의 가장 완전한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에서 사용되고 있는 증언(martyria μαρτυρια) 또는 증언하다(martyreo μαρτυρεω) 라는 용어가 항상 순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증언에 대한 사상이 항시 순교에 대한 사상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런 사상의 극치가 1,5에서 나타난다. “충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5) 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을 잘 표명해 주고 있다. ‘땅 위의 왕들의 지배’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시는 그분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렇게 볼 때 ‘충실한 증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충실한 증인으로 계시하신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내 놓으시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지고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순간인 것이다.

 

 

자기가 본 모든 것” (1,2)이라는 표현은 묵시록 즉 환시에 대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의 하느님은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말이다. 성서에서 이 두 개의 말은 특별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창조하고, 선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은 세상을 창조하시는 10개의 말씀들을 전해주는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창세 1장).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만을 빌려주는 것으로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입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한 인격의 행동인 것이다. 성서의 말씀을 듣게 되는 우리 육체의 기관은 귀만이 아니다. 마음까지 필요하다. 마음은 인지 능력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성서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주석할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그저 수동적인 자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라는 동사는 말씀을 주석한다는 의미를 제쳐놓고서라도 삶과 행위들 속에 주석한 말씀을 실천해야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듣는다’라는 말은 곧 ‘순종하다’라는 말이다. 성서의 글은 말씀의 특별한 외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과 함께 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말씀을 문자를 통해 영원 속에 고정시켜 놓은 말씀이다. 말씀을 변형시킬 수 없는 영원한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이요, 말씀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려는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고, 당신의 메시지를 덧없는 시간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성서의 저자이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얼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가시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인간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환희이며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시적인 분이 되셨다 (요한 14,9~10). 즉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느님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고자 하는 열망을 구현하려는 지상적 인간에게 최종적으로 보여지신 하느님이시다 (이사 52,8).

 

요한 묵시록은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 그러나 고정된 말씀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말씀과 성서 그리고 환시는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도록 드러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록 전체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증언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증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완전한 표현을 찾아내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에서 비롯되는 후속 결과의 내용들이 묵시록 안에 소개되고 있다.

 

 

복되어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이와 듣는 사람들!”(1,3) 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종교의식적이고 전례적인 용도의 독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골로 4,16; 테살 5,27).

묵시록에서 “복되다”라는 표현의 축복문이 일곱 번 나온다. 묵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의미를 감안할 때,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개의 축복문(1,3; 14,13; 16,15; 19,9; 20,6; 22,7; 22,14)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묵시록의 저자가 의식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구약성서 안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충만함’ 등을 나타낸다. 그 숫자는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를 완성하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묵시록 안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행복의 완전성이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 묵시록은 완전한 행복의 길을 제시해 주는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요한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물론 소아시아에 있는 구체적인 일곱 교회가 그 대상이지만, 상징적으로 전 교회가 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묵시록은 묵시록을 읽고 듣는다는 것을 행복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1,3). 묵시록에서는 “때”라는 용어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성서에서는 “때”를 지칭하기 위해 kairos [καιροs]와 xronos [χρονοs]라는 두 개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서에서 xronos 는 진행되어 가는 역사 안에서의 시간을 의미하고, kairos 는 하느님께서 xronos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기 위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당신 자신을 표명하시는 그런 순간을 지칭한다. kairos 는 인간들의 xronos 를 구원의 역사로 변모시키시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특징지어진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xronos 가 4번 사용되고 있으며 (2,21; 6,11; 10,6; 20,3), kairos 는 본문을 포함해서 7번 사용되고 있다 (1,3; 11,8; 12,12.14[3번]; 22,10). kairos 가 계약의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해 주는 데 반해 xronos 는 인간 실재를 의미해 준다. 예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이후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으며’(요한 19,30)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느님 나라의 때(kairos)는 이미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시간(xronos) 속에서 드러난다. 요한 묵시록은 고통스런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면서, 그러한 삶이 행복과 위안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은 읽고 듣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읽고 들은 예언의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그리고 이 묵시 1,3의 행복선언은 묵시 22,7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1,3은 머리말 부분이라면 22,7은 종결문에 해당된다. 묵시 1,3만을 읽게 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가 있으며, 이 경우에 행복선언은 절박한 권고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묵시 22,7에서는 1,3의 형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곧 오겠다’라는 말이 전제되고 있으므로 묵시록의 행복선언은 절박한 권고라기보다는 행복에 대한 언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론 행복선언의 근원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루가 11,28).

 

이 묵시록의 머리말 부분(1,1~3)은 전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부분 속에서 언급된 인물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사실상 말씀의 전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 표징들 → 천사 → 요한 → 읽는 사람 → 듣는 사람”의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며, 신앙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아멘’ (22,20)으로 응답함으로써 그 말씀에 동의를 표현한다. 전례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원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2. 편지의 인사 (1,4~8)

요한 묵시록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례적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개의 행복 중 첫 번째 행복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관계된다 (1,3). 예언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지키도록 촉구하는 여섯 번째의 행복(22,7)이 그에 대해 응답해 준다. 그러므로 파트모스 섬에 유배가 있던 요한에게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아마도 주님의 날에 (主日 1,10) 모여 있던 교회 공동체에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편지의 인사 부분도 전례적 대화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묵시록의 종결문인 22,6~21과 문학적으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두 부분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4~8

22,6~21

8절: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13절: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다.

7절: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7절,12절: 내가 곧 오겠다.

7절: 그렇습니다. 아멘.

20절: 아멘.

4~5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부터, (4절)

또한 충실한 증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 분이시며 땅 위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내리시기를 빕니다. (5절)

21절: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이와 함께

 

 

위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례의 개회 인사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으로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주체가 되시고, 폐회 인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고 있다. 이처럼 묵시록의 전례 방향은 하느님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묵시록의 종결문에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론적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요한 묵시록은 편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발신인, 수신인, 은총과 평화의 기원에 대한 언급 등), 종교의식(전례)적인 대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보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묵시록을 쓴 저자는 이 책이 전례적 독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편지의 인사 부분은 우선 종교의식(전례)적인 염원을 발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부터, 또한 충실한 증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 분이시며 땅 위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내리시기를 빕니다.”(1,4~5a) 그리고 뒤이어 공동체의 응답이 나타난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써 우리를 우리 죄에서 풀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1,5b~6) 그리고 7절에서 집전자의 말씀 선포가 이어지고 공동체의 “아멘”이라는 응답으로 끝맺는다. 8절에서는 집전자가 하느님을 선포한다. 이와 같이 ‘편지의 인사’ (1,4~8) 부분은 하나의 훌륭한 전례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 (1,4)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인데 8절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다. 그 이름은 출애 3,14의 야훼의 이름을 신학적으로 의미를 확대시킨 것이다. 네 글자 즉 YHWH 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인지할 수 없는 하느님을 형이상학적인 숙고를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깨달은 신앙의 결과로 이해된 것이다. 우리는 출애 3,14에서처럼 ‘있다’라는 동사를 존재론적인 가치 측면에서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신다”는 실존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의미적으로 풀이한 1,4의 이 표현은 우리 곁에 지금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항구한 특성을 표현해 준다. 즉 야훼 하느님은 어제도 여기에 계셨고,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지금도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의 결실로서 다시 이 자리에 오시어 현존하실 것이다.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 (1,4)이란 메시아 위에 머무시게 될 일곱 영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충만한 영을 의미)을 열거해 주는 70인역 성서 이사 11,1 이하의 내용을 암시해준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이사 11,1)

그리고 ‘옥좌’에 대한 언급은 묵시록 4장과 5장의 환시를 미리 엿보게 해주는 암시이며, 이 편지의 인사 부분과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묵시 4,5과 5,6에 나오는 일곱 영에 대한 언급은 즈가 4,2.10에 나오는 등잔에 대한 예언을 연상하게 한다.

요한 묵시록

즈가리아서

그리고 옥좌로부터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오고 옥좌 앞에는 일곱 개의 횃불이 불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4,5)

 

그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금으로 만든 등잔대기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 (4,2)

그 때 나는 보았다. 옥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서 어린양이 서 있었는데 살육당한 것 같았다.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다. (5,6)

일이 자잘하게 시작되어 사람들이 빈정거렸지만, 즈루빠벨이 골라 놓은 돌을 보고는 그 사람들도 기뻐할 것이다. 이 일곱 등잔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4,10)

 

성령은 계약의 보증인이요, 수호자이시다. 여기서는 계약의 완성에 있어서의 그분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일곱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의 모습을 지칭하고 있다. 성령은 교회를 이끌어 갈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래서 각 교회 공동체 안에 현존하셔야만 하시는 분이시다. 묵시록이 기록될 당시, 로마 법정에서 변호사는 재판관과 기소자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로마 법정에서 변호사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교회 공동체들에게는 성령은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다.

 

충실한 증인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 분이시며 땅 위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5)라는 표현은 세가지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에수 그리스도께 부여하고 있는 이 세 가지 호칭들은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요약해 준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은 골로 1,18에서처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칭하는 것이고, ‘땅 위 왕들의 지배자’라는 것이 하느님의 우편에 들어 올려지심으로써 얻게 된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분께서 충실한 순교자로서의 증인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해서인 것이다 (요한 18,37).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표현이 우선적으로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기적인 선행성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제일 먼저’ 부활하신 이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형제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분의 수난과 영광(현양)에 연계시키고 있다는 것이 박해라는 맥락 속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 충실한 증인이 되시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을 때이다. 그분께서는 아버지를 당당하게 증언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셔야만 했으나 하느님께서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시고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 그러나 박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해 있던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희망과 용기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었던 원동력이었고, 그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처럼 개회 인사를 하고 계신다. “편지의 인사” (1,4~8)부분을 볼 때, 하느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고 계시고, 성령의 충만함이 주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에, ‘은총과 평화’가 교회 공동체들에게 보증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요약 내용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 같은 점은 곧 소개될 전례적 찬양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다.

 

개회인사에 뒤따르는 공동체의 응답인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써 우리를 우리 죄에서 풀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1,5b~6) 이라는 부분은 대부분의 내용이 구약성서의 도움을 받아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업적을 기리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찬미가는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예언자들의 활동과 역사(役事)를 정의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의 내용을 세 가지로 선포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둘째로는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신 분이고, 셋째는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1,5)라는 표현의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현재분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동사는 필라델피아(3,9)와 라오디게이아(3,19)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도 감동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베풀고 계시는 사랑은 (동사의 현재형) 지난날 그분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심으로써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갈라 2,20; 에페 5,2).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행위를 묘사할 경우,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묵시 1,5b에서처럼 현재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없다. 이 같은 사실은 묵시 1,5b에 나타나는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현재에 대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즉 묵시 1,5b는 그리스도께서 오늘 바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또한 그분께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준 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베풀고 계시는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그분께서 진실한 증인으로써 순교의 삶을 수락하신 것을 의미한다.

 

당신 피로써 우리를 우리 죄에서 풀어 주시고” (1,5)라는 표현 역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이루신 구원사적 업적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서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이지만 ‘풀어주다’라는 동사는 단순과거형이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피흘림을 통해 구속한다는 것은 출애굽을 암시하고 있는 묵시 5,9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1,5b~6과 5,9~10의 구조가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당신 피로써 우리를 우리 죄에서 풀어 주셨다’는 표현은 결과적으로 파스카적 구속(救贖)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1,6)이라는 표현은 순교자와 같이 진실한 증인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두 가지 결과를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인들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그 표현을 통해서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놓여져 있다는 의미로 알아듣게 된다. 하지만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이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방식에 자신들의 행위를 맞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된 것이라고 묵시록은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포는 출애 19,6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에집트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끌어내신 후에, 어떻게 그들을 해방시키게 되었는지를 상기시키면서(출애 19,4), 장엄하게 이스라엘을 세우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얻게 된 영광의 호칭들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1베드 2,5.9에서도 나타난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1,6)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업적을 상기시키는 공동체의 응답으로서, 묵시록 다른 곳에서 길게 언급하고 있는 찬미가의 내용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라는 이중적인 찬미가를 드리고 있다. 이 ‘영광과 권세’라는 찬미를 통해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에 대해서 공동체 전체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아멘’이라는 말로 응답을 하고 있다.

 

 

아멘” (1,6.7)이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서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의미이며, 주로 기도나 찬미가 끝에 사용되어 왔다. 이 표현은 그러므로 1,5b~6이 전례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강조해주는 것이다.

 

 

보시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1,7)에서 ‘오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1,7~8에서 다니 7,13과 즈가 12,10을 혼합해서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구약성서의 내용을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거행하는 전례가 구약의 예언서 본문의 독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구름’이란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뒤덮고 있는 신적인 표상이다. 구약성서에서도 구름은 자주 신현현(神顯現)과 연결지어 사용된다 (출애 19,16)

 

이 표현이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귀환이 아니라, 그분의 도래이다. 그분의 귀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반복이 불가능한 그분의 미래 행위에 대해 암시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도래는 눈앞에 와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그분의 도래에 대해 신앙의 의구심에 사로잡힌 신앙 공동체들에게 요한 묵시록 저자는 최종적인 재림에 대한 희망을 더 강렬하게 하며 주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시리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록 저자는 주님의 도래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재난의 연속으로 보지 말고, 하느님의 신학의 성취로 보라고 가르친다. 예언자는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들 한 가운데서조차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그러나 실제적인 역사(役事)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아멘.” (1,7) 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의미의 희랍어와 히브리가 동시에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표현은 마르 14,36에 나오는 ‘아빠, 아버지’라는 식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라는 것과 ‘아멘’과 구분함으로써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가려낼 필요가 있는데,  ‘그렇습니다’라는 용어가 묵시록에서는 3번이나 나타난다 (14,13; 16,7; 22,20). 그것이 때로는 응답을 지칭하지만, 그러나 인간들 편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들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온 하늘이 떠받치고, 함께 공유하는 하느님 계획의 일체성을 표현해 준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1,8)라는 표현에 이어서 요한 묵시록 서문은 찬미가 형태로 종결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아멘’이라는 응답에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고 계시는데, 알파는 희랍어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희랍어의 마지막 글자이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시작과 마지막이시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묵시 21,6과 22,13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문자를 가지고 의미를 드러내는 이런 방식은 유다이즘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던 것이었고, 때로는 이사 44,6에서처럼 본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알파요, 오메가’라고 지칭하는 의도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기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초에서부터 끝까지 그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점을 지적해 주려는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서의 글들 안에 그리고 모든 사건들 안에 처음부터 그것들이 목적을 성취하는 순간까지 자리하고 계시며 그 역사가 성취라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자리하고 계신다.

 

인간들의 삶은 이렇게 역사의 시작과 성취라는 두 지점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주재자’ (Pantokrator)로 군림하신다.

 

만물의 주재자” (1,8)라는 용어는 야훼 사바옷(YHWH SABAOTH)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도미시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공식 문서 속에 자신을 ‘만물의 주재자’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행위는 하느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만이 전능하신 분(만물의 주재자)이라고 9번씩이나 되풀이해서 주장하고 있다 (1,8; 4,8; 11,17; 15,13; 16,7.14; 19,6.15; 21,22).

 

 

3. 인자에 관한 환시 (1,9~20)

요한이 1,9에서부터 서술하고 있는 체험의 상황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요한의 체험은 파트모스 섬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1,9) 주님의 날이라는 특별한 기회에(1,10) 영에 사로잡힌 예외적인 내적 상태에서 이루어졌다(1,10). 이 구절은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1,9)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었다는 구체적인 이유까지 제시하고 있기에, 묵시록 저자가 개인적으로 실제 체험한 것을 적어 놓은 보고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그런 차원에서 읽어야 한다. 인자에 관한 환시 장면은 요한 묵시록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전망 속에 삽입되어 있으며, 지체 없이 그리스도를 중심인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전체적으로 보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미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초자연적인 면이 강조되어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처럼 부활하시어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살아 계시어 역사(役事)하시며 오늘의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항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처럼 인상 깊게 전해주는 신약성서의 글도 그리 많지 않다.

 

 

요한 묵시록이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세상으로부터 승리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결정적 신앙인 것이다. 인자에 관한 환시는 요한 묵시록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주는 첫 번째 이야기이다. “여러분의 형제이며 동참자인 나 요한은” (1,9)이라는 표현에서 ‘요한의 형제와 동참자’는 두말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의 다른 내용들 속에서 볼 때 형제와 동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묵시록 저자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특성이 필연적으로 순교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의 특성 속에는 순교적인 의미가 물씬 배어 있다 (6,11; 12,10 참조). 그런 이유로 해서 인내의 동참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련이란 종말론적 시련을 의미하지만 (묵시 7,14; 마르 13,19.24; 2데살 1,6~7) 그것들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시련들, 구체적으로 말해서 박해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련과 나라와 인내라는 표현을 통해서 묵시록 저자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주님의 날”이라는 부활 전례 거행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지적해 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묵시록 저자는 자신이 체험한 바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 그는 자신이 구약의 대 예언자들의 전승에 연계되어 있음을 표명해 주고자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환시를 받은 장소, 시간 그리고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묵시록 저자가 전해주는 자료들은 예언자적인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트모스 섬” (1,9)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맡기시기 위해 사로잡힌 사람이 겪게 될 외로움의 상태를 특징적으로 표현해주기 위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 저자가 실제로 그 섬에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에제키엘, 다니엘, 이 두 예언자들이 겪었던 상황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케바르 강가로 유배간 자들 가운데 머무는 동안 바빌론에서 환시를 받았고 (에제 1,1)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시에 환시를 받았다 (다시 7,1).

 

묵시록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그 섬에 있게 되었다 (1,9). 묵시록 저자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개인적인 상황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함으로서 박해와 죽음을 겪어야만 했던 옛 예언자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6,9~11; 11,3~13).

 

 

주님의 날” (主日/ 1,10)이라는 말은 신약성서를 통틀어서, 본 대목에 단 한 번 나타날 뿐이다. 훨씬 후대에 와서 이 용어가 일요일(주일主日) 즉 주간 첫날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영어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church라는 단어는 바로 이 ’주님의’라는 뜻인 그리스어 형용사 키리아케(kyriake)에서 왔다.

 

 

…와 같은 큰 음성” (1,10)이라는 표현은 요한 묵시록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은 문학적 표현 그대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은 실재를 설명해 주기 위한 장식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만 한다. 이 구절에서도 ‘나팔소리와 같은 큰 음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나팔소리를 연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다인 전승 속에서 볼 때, 나팔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출애 19,16이나 히브 12,19을 보면, 주님의 현현(顯現)이 나타날 때 나팔소리가 울린다. 그러므로 나팔은 그리스도의 귀환(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기 위해서 선택된 도구라 할 수 있다 (마태 24,31; 1고린 15,52; 1데살 4,16). 12절 이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나팔소리는 바로 인자의 소리인 것이다. 10절에서는 묵시록 저자가 처음으로 환시를 어떤 상태에서 보게 되었는지를 전해주고 있는데, 바로 이어지는 11절에서는 묵시록 저자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보내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그것을 읽고 베껴 쓰게 될 수신자들이 거처하고 있는 마을(일곱 교회)에 전달해야만 할 두루마리를 의미한다. 묵시록 저자가 적어서 보낸 편지는 일곱 교회에 전달이 된 것이다.

 

 

일곱 교회’ (1,11)는, 구체적으로 그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지칭하지만, 일곱이라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충만함과 완전함’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보편성을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교 공동체 모두를 지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트모스 섬에서 있었던 묵시록 저자의 두 번째 예언자적 체험은 (1,12~19), 일곱 개의 황금등경 한가운데 나타나신 “인자 같은 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묵시록 저자가 본 환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자 같은 분에 대한 묘사 내용이 환시의 첫 번째 부분이며, 두 번째 부분은 인자 같은 분이 요한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으로 되어있다. 인자 같은 분이 요한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은 묵시 1장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 교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아 적은 내용을 전해주는 3장까지 지속된다. 1~3장까지의 내용을 읽어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구약성서의 내용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에제 1~3장; 다니 7~12장).

 

 

일곱 개의 황금 등경” (1,12)이라는 이미지는 그 기원을 구약성서에 두고 있다 (출애 25,40; 37,17; 즈가 4,2.10; 1열왕 7,49 등). 여기서 일곱 개의 황금 등경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 (즈가 4,10)으로서 성령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1,20에서 일곱 등경이 일곱 교회들이라고 주석하고 있는 내용과 구별해야만 한다.

 

 

인자 같으신 분” (1,13)의 이미지는 다니 7,13에서 빌어다 쓴 것인데, 다니엘서에서의 인자는 옥좌에 앉아 계신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가신 분으로 지칭되고 있으며 그것은 메시아를 표상해 준다 (다니 7,9.13~14). 여기서 묵시록 저자는 ‘계시하시는 분’을 인자와 동일시 하고 있다. 황금 등경 한 가운데 나타난 인자는, ‘태고적부터 계신 이’ (YHWH)가 지니고 있는 특성과 결정적 ‘계시의 주석가’ (1,13~16)가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다 (다니 7,14~16).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묵시록 저자는 에제키엘 예언자와 다니엘 예언자가 야훼 하느님께 부여하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인자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묵시록 저자는 인자의 ‘머리와 머리털이 양털같이 희었다’고 1,14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니 7,9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야훼 하느님과 그분의 영원성을 특징적으로 묘사해 주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또 묵시록 저자는 그분의 ‘눈이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고 1,14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다니 10,6에서 따온 것이다. 그 같은 표현은 묵시 2,18과 19,12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께서 보편적 심판관으로서의 권한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표명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묵시록 저자는 또 ‘그분의 발이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았다’고 1,15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니 10,6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절대성을 표상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그분의 음성이 대단한 물소리 같았다’고 1,15에서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에제 43,2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 계시의 보편성을 표상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묵시록 저자가 예언서의 내용을 그와 같이 수정하여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은 예언서에 예고된 인자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묵시록 저자가 인자를 묘사해 주는 내용들은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야훼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지속성 또는 일체성이 표명되고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계시를 성취하신 분이시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 (1,13)은 히브리 대사제들이 입던 옷을 지칭한다. 묵시록 저자는 이 표현을 통해 인자가 참다운 사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희생제사를 바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점은 묵시록 저자가 본 환시가 십자가 죽음을 뛰어 넘어 부활을 통해 열어젖힌, 그래서 이제부터는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인자가 행하시는 계시의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다는 새로운 증거이다. 더 이상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인자는 ‘죽음과 저승으로부터 승리하여 영원히 살아계신다’ (1,18).

 

 

그분의 입에서는 나오는 “날카로운 쌍날칼” (1,16)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꿰뚫어 보고, 선과 악을 냉혹하게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예언자 전승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을 메시아의 도래 사건과 연계시키곤 했었다. 묵시록 저자는 그러한 전승을 계승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은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이 묵시록 저자가 주장하려는 핵심이다.

 

 

나는 그분을 뵈었을 때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내게 당신 오른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1,17)라는 표현은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종들을 걱정하시고 염려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다가와 말씀하시고 격려하시고 오른손을 얹으시는 분으로서 16절에 의하면 일곱 별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시다. ‘죽은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인간들이 원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인자가 손에 쥐고 있는 “일곱 별” (1,16)은 일곱 교회를 지키는 수호천사들(1,20 참조)을 나타낸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다. 그러나 보라, 이제 나는 영원무궁히 살아 있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17c~18)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승리 선언이다.

 

요한 묵시록 저자에 의하면, 하느님의 심판은 분명 영원으로부터 진행 중에 있고, 역사의 흐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묵시록 본문을 계속 읽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묵시록 저자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사건’ 즉 예수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될 때, 하느님의 심판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들의 감추어진 의미와 그 사건들의 실제적인 가치를 벗겨 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판의 판단 기준을 고정시켜 놓게 되었다. 이제부터 심판은 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것은 세상 끝 날까지 그런 모습으로 행사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종료된 하느님의 심판의 첫 번째 단계는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 흰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로고스(λογοs : ‘말씀’)에 대한 환시 속에서 묘사될 것이다 (19,11 이하).이 로고스 역시 불꽃 같은 눈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온다 (19,12.15). 그러나 그 때에는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로고스는 인자와 같이 사제들이 입는 긴 옷을 입는 대신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다 (19,13). ‘피에 젖은 옷’이란 로고스가 아직 감수해야만 하는 희생제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분의 이름 역시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12.16).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심판의 두 번째 단계는 인자의 모습을 묘사해 주는 바로 1,13~19 속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록 저자에게 글로 기록하라는 명령을 다시 반복하시는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1,19)라는 명령은 “큰 음성” (1,11)을 냈던 분과 동일시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명령의 내용은 보다 상세하고 풍부한 것으로 그것은 보다 완전한 계시를 지칭해 주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은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경의 신비에 대한 계시와 편지를 써 보내라는 것이다 (2~3장).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경의 “신비” 역시 묵시록 저자가 이 책 속에 기록하여야만 하는 모든 것의 일부라는 것은 확실하다 (1,19). 예수께서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일곱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 (1,20) 라고 말씀하신다. “신비”라는 용어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의 구현에 관계되는 무엇인가를 밝혀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계획의 구현에 관계되는 무엇인가를 밝혀 주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것이 묵시록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 용어의 의미이다 (10,7; 17,5.7). 천사(들)이라는 용어 역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천사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도구로서 인간 사이에서 옛 구원 경륜이 진행되는 동안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 중재하는 존재들이다 (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오른손에 쥐고 계신 별들이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들의 선교가 “일곱 교회”(모든 교회)를 건설하고 구원된 모든 인간을 한데 모이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말하려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점을 종결문에서 확증해 주신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을 위하여 너희에게 이것을 증언하게 하였다” (22,16).

 

다른 본문들 속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중재자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끝마쳤다는 점에서 “일곱 교회”들이다. 이제 그들은 그 어떤 특별한 직무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자들로서 교회에 속한다. 그들은 신앙인들과 같은 존재이다 (19,10; 22,9). 인자가 자기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다는 것(권세의 상징)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1,16). 이제부터 천사들은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말하고 있듯이 (2,1) 인자의 통치에 예속되어 있다.

 

등경들은 유다인 종교의식에 대한 평범한 상징이며 유다이즘의 영적인 본질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 점이 “땅의 주인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나무요 두 등경” (11,4)이라고 불리는 두 증인(11장)에 관한 일화 속에서 묵시록 저자가 투영시켜 주고 있는 즈가리야의 그 유명한 환시(즈가 4장) 속에서 나타난 의미이다.

 

등경들이 “일곱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분의 메시아적 업적의 성취와 더불어 유다이즘이 “일곱 교회 즉 하느님의 전체 백성” 안에서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절정이며 “신비”의 성취이고 묵시록 전체의 의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자에 관한 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앙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일곱 교회를 표상하는 일곱 등경 한 가운데 서 계시는 그리스도는 역사 해결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이시다 (1,17).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부활의 조명을 받아 판단되어야만 한다. “곧 이루져야만 할 일”이란 묵시록 저자가 보편적 중요성을 표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신비를 펼쳐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메시지를 듣기 이해 모인 교회 공동체는 “귀가 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는 말씀을 숙고하는 노력을 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13,9.18).

 

(안병철, 요한 묵시록 I, 39~100p; 박찬용, 요한의 묵시록 주해, 5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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