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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회의 보석]카르투시안 수도회(10월6일 성브루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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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0-11 ㅣ No.690

 

성교회의 보석,카르투시안 수도원과 성 브루노.

 

연중내내 눈 덮인 프랑스 알프스산 중턱(해발 1300미터)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

<샤르트뢰즈>라고도 하는 이 카르투시안 수도원은 철저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이며, 1081년 성 브루노가 창설한 카르투시안 수도회이다.

(축일;10월 6일.게시판679번참조)

 

사방이 벽으로 갇힌 곳에서 바깥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말하지도 못하고 매일 한끼만의 식사로 소재를 지키며 세상 모든 인간적 재미와 흥미를 떠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리는 이곳 수도승들의 세상을 떠나 홀로 선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자신만의 특별한 성소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이들 수도승들의 희생과 보속을 시대에 뒤떨어진 우둔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희생과 보속이 쓰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나 해당 되는 말이지,사실 이들에게는 너무도 즐거운 영예이다. 많은 이들은 이들의 은둔생활이 세상을 외면하는 사랑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지만,이들이 매일 홀로 숨어서 주님께 올려 바치는 미사성제, 희생과 보속,기도,모든 인간적 아픔등이 누구들 위한 것인지를 안다면! 이들이야 말로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주님께 호소하고 있는것이다.

혼탁한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사랑의 주체인 것이다.

 

 

이 수도원은 세상의 변천에 동승하지 않고

거의 천년동안 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수도회가 더 이상 엄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모두 완화된 규칙을 채택했으며,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도 윈래의 엄률로 돌아오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카르투시안회 만이 단 한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카르투시안 수도승들은 각자 은수처에서 독거생활을 한다.

돌덩어리로 지은 수 백년된 은수처는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작업실,장작보관소,화장실이 있고, 2층은 침실,기도실,공부방,성모경당이 있으며, 3층은 바닥 전체에 모래가 깔려있다.

하느님과 함께 숨고 싶을때 사막 같은 이곳에서 기도할 수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저녁 7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녁 11시 30분에 다시 일어나서 밤기도를 마친 후 다시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음식은 점심 한끼만 제공되는데,조그만 구멍문을 통해 들어온다.

아침식사는 없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만 먹을 수 있다.

카르투시안은 어떤 경우에도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콩이나 치즈를 자주먹느다.매주 금요일은 물과 빵으로 때운다. 점심에 먹은 식사가 남았더라도 남겨 놓지 않으며 오후 2시 이전에 음식창을 통해 모두 반납한다.

 

하루에 3번 - 미사,저녁기도,아침기도때 - 수도승들은 각자의 은수처를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수도원내의 고풍스러움,조각들,성화들,수도원임을 인식시켜주는 여러 분위기들이 배어있는 복도만 걸어도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수도복 두건을 푹 덮어 쓴 채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에 이미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진다.

이곳의 기도의 양은 타 수도원의 배가 넘는다.

 

수백년동안 전승된 고유의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있어 이 기도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가톨릭 전례를 그 원형대로 보존해 온 수도원이다.

모든 전례는 라틴어로 한다.라틴어 만큼 하느님을 아름답게 찬미할 수 있는 언어 또한 없기 때문이라고한다.

 

전례의 절정은 ’녹턴’이라는 밤기도(성무일도의 아침기도에 해당됨)인데,

자정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나는 장대한 기도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로 읊어지는 모든 시편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이곳 수도승들은 거의 모든 시편을 암송하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은은히 성가로 암송한다. 옆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중세풍의 대성당에 울려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그 여운... 불빛이라곤 감실의 불빛만이 보인다.

 

수도승들은 봉쇄수도승,평수도승,일반수도승,이렇게 3계층으로 나눠져있다. 봉쇄수도승들은 모두 사제이다. 하루에 세번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미사,저녁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로 각자의 은수처를 떠날 수 없다. 철저히 갇혀서 하느님과의 일대일 관상에 정진한다. 이 사제들은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미사를 드린다.봉쇄수도승들이 각자의 미사를 봉헌하는 경당이 50여개나 된다. 그렇지만 대성당에서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그리고 아직 서품을 받지 않은 봉쇄수도승를 위해 한명의 사제가 교대로 미사를 봉헌한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사목적인 지향이 전혀 없고

-심지어 수도원 안의 다른 수도승에게 까지도- 오로지 관상에만 힘쓴다.

세상의 눈으로보면 이들은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한 채, 각자 영신수련에만 힘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갇힘,세상과의 결별,희생,은수를 통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충을 떠 안고 있는 것이다.

 

이곳 수도승들은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에 산악 행군을 한다.

운동 부족을 보충해서 육체적,정신적 침체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극기 훈련이며,비가와도 이 산악 등반은 취소되지 않는다. 등반은 굉장히 힘든 강행군이다. 도중에 가다 쉬는 일이 없다. 이 날 만큼은 서로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두사람씩 짝을 지어 가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짝을 바꾼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수 있도록 모두 한번씩 만난게 된다.

이때 나누는 대화는 영적 주제들 뿐이다.

 

수도원 내에서의 침묵은 거의 절대적이다.

말 뿐만 아니라 발걸음,문소리 하나하나에도 조심하려고 애쓴다. 대성당입구엔 일렬로 나열된 개인 사물함이 있는데 전할 말이 있을 경우 쪽지를 써서 당사자 사물함에 넣는다. 이웃 사랑이 말 없이도 침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녹턴’또는 저녁기도 때 사용하는 카르투시안 성무일과 기도서는 어른 팔 길이만큼 크다. 건강한 수도승이 힘을 다해야 들 수 있을 만큼 무겁다. 그런데 성당에 맨 먼저 도착해서 이 모든 기도서를 꺼내 수도승들 가대에 페이지까지 정확히 펼쳐 놓은 수도승은 70 이 넘은 수도승이다.

 

신학과정에 있는 수도승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없을 경우,외부에서 신학교 교수를 초빙한다.이곳 수도승들은 절대 외출을 하지않는다. 수도승마다 그 진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진도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각자의 역량대로 따로 지도한다.신학이 수업을 통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각 수도승의 관상 생활 자체가 되도록 지도하며,신학과 철학을 가슴으로 체험하고 이해하며,기도의 삶이 되도록 배려한다.

 

이곳은 대축일이 오면, 그 전날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며 미리 마음을 준비한다. 대축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미사나 성무일과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장대하다는 것 뿐이다.

 

지난 10월 6일은 이 수도원의 창립자이며 카르투시안 은수 생활의 시조인 브루노성인이 서거한지 900년 된 대축일 이었다. 유럽 가톨릭교회는 브루노의 해로 선포했기 때문에 전 유럽의 눈길이 이 수도원에 쏠렸다.

 

그러나 카르투시안 수도회는 성인의 은수자적 정신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숲 속 암자 같은 작은 성당에서 조촐하게 미사를 봉헌 했다. 미사의 주례를 맡은 추기경과 지역 주교외에 그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이 수도원에게 그날은 더없이 큰 축일이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침묵과 평소와 다름없는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다. 그것은 과연 진정한 대축일의 정신이었다.

 

대축일 같은 툭별한 날이 아니면,사제는 십자가 상을 향해 미사를 드린다.

인상적인 것은 성찬전례 때 정적과 침묵 속에서 미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변화 시키고,거양하고,교회와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주례 사제도 정적 속에서 속으로 경문을 외운다.

너무 엄숙하고 고요해서 긴장감마저 감돈다. 이 순간 미사 참례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최고의 흠숭을 드린다.

 

현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수도회의 영성은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성교회가 택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결정된 교회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수도회의 영성에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관상수도회조차 이에 동승하는 추세이다.

 

사랑.기쁨,화합의 영성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주신 선물임에 분명하지만, 이영성이 과거의 침묵,고독,희생등 수덕적 영성보다 더 낫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교회가 몰랐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은 열어 주신 것이지, 과거의 길을 폐쇄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쁨과 화합의 영성이 현 시대의 주류를 이룬다고 해서 과거의 수덕적 영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다이제스트 10월호 참조)

 

게시판 679번  10월 6일 성브루노 축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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