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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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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0-19 ㅣ No.1524

민들레처럼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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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민들레꽃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합니다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민들레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와 내 손에까지 몰래 쥐어준

그 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는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풀잎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순과 흙무더미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밟히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성의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를,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 박노해, 『참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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