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게시판
[상아탑]시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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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박노해 --------------------------------------------------------------------------------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민들레꽃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합니다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민들레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와 내 손에까지 몰래 쥐어준 그 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는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풀잎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순과 흙무더미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밟히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성의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를,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 박노해, 『참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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