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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3일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사제(군종신부들의 주보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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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0-22 ㅣ No.714

축일;10월 23일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사제 (1386-1456년) 이탈리아

St.John of Capistrano. 작은형제회

군종신부들의 주보성인. 법조인의주보.

 

요한 카피스트라노 (1386-1456) 요한은 1386년 6월 24일 L’Aquila에 가까운 Capistran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작이었다. 그 가족은 그 지역 정치와 당파 싸움의 경쟁과 증오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기에 요한의 어린 시절은 그의 많은 가족들이 살해를 당하는 슬픈 역사로 얼룩져 있었다.

요한은 후에 페루지아로 떠나 거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페루지아가 Malatesta 군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요한은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이 시기인 1415년에 그는 프란치스칸 형제로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가 30세 되던 해에 그는 Observant 계열인 Monteripido(페루지아에서 가까운 지역)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시기 동안 교회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문제가 심했던 상황을 겪게 된다. 1417년 Constance 공의회는 서방의 대분열(The Great Schism)로 막을 내렸고, 마르티노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제자가 되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있어서 위대한 개혁가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430년에 그는 마르티노 회헌을 제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형제회의 순수한 개혁 시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황 Eugene 4세는 Observant 운동에 굉장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의 개혁 프로그램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축일 5월 20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알려진 베르나르디노는

IHS-예수님의 희랍어 이름 첫머리 세글자-를 빛나는 태양광선에

고딕체로 쓴 상징으로 만들었다)

 

1441년에 요한은 성지(1439년에 교황이 Observant로 하여금 성지에 속관구를 세우게 하였음)에서 돌아온 후 이태리 Observant 가족의 총봉사자 대리로 선출되었다.

1446년에 교황 Eugene 4세는 “Ut Sacra Ordinis Minorum”이라는 칙서를 통해

Observant 가족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주었다.

 

한편 요한 카피스타라노는 성녀 클라라의 회칙 준수에 강조점을 두고 프란치스칸 제 2회의 개혁에 있어서 상당히 열심히 일하였다. 교황들은 유럽의 많은 이단들에 대항해서 설교를 하도록 요한 카피스트라노를 뽑아 다른 여러 나라에 자신들의 대사로 파견하였다.

요한 카피스타라노는 유럽의 위대한 사도들중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는 독일로, 폴란드로, Transylvania로, Moldavia로, 러시아로 두루두루 다닌 사람이다.

 

Muhannad II세 술탄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침공해 들어오자 유럽의 세계는 절박한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Turk족의 진출을 막기를 원했다. 이들은 유럽으로 침투해 들어와 Belgrade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1456년 요한 카피스트라노는 투르크들을 대항하여 십자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투 동안 요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456년 10월 23일 Ilok(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690년 알렉산델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카피스트라노를 군종신부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교황의 조언자였고,"유럽의 사도"라는 칭함을 받았으며, 그의 사도적 행위는 다양하였습니다.40년동안 그는 설교에 전념하여 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을 변신케 하였으며 여러 도시에서 행한 설교에서 단한번의 설교로 백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프란치스코 회원으로 입회하게 하였습니다.그는 수없이 자신의 과실을 고백하였고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며 병원을 짓는 등 여러가지 자선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성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www.ofm.or.kr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하층 성당 제대모습.

(치마부에가 그린 유명한 프란치스코 그림이 왼쪽에 있음)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낙관적인 사람들로 전해진다.

악의 현존과 그 결과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에 맡긴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의 힘은 죄인들에게뿐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까지 확대된다.

14세기에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인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40퍼센트가 흑색,페스트 죽음에 휩쓸려 갔다. 동시에 서방의 대분열은 교황이라고 자칭하는 두세 명이 교회를 갈라놓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이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도 계속 싸우고 있었다.

당시의 문화와 시대 정신이 암흑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요한 카피스트라노는 종교적인 무관심과 혼란의 시기에서도 수많은 군중을 끌어들였다. 그와 12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중부 유럽국가들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영접되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신앙과 신심을 되살리는 데 도구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자체가 성프란치스코의 규칙에 대한 해석과 실천을 놓고 혼란에 빠졌다. 요한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의 전문적 법률 지식을 통하여 이단적인 프라티첼리(Fraticelli) 는 사라지고 ’신성함(Spiritualis)’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희랍 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애썼으나 불행히도 사소한 진전밖에는 이루지 못했다.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그는 유럽을 방어하기 위한 십자군 모집을 설교할 사명을 받았다. 바이에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약간의 호응을 얻은 그는 헝가리에서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하고 자신도 벨그라드에 군대를 이끌고 갔다. 요한 유냐디 대장의 지휘하에 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벨그라드의 포위를 풀었다.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은 마음과 몸이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전염병에 쉽사리 희생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456년 10월 23일이었다.

 

요한의 전기 작가인 요한 호퍼는 이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브뤼셀회를 상기시키는데

그 회는 완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조직의 표어는 자율적으로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세 가지 말로 되어 있다.

이말은 요한의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는 잠시라도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깊은 그리스도교적 낙관주의는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생겨난 신뢰로

온갖 것, 전쟁 문제까지 다루었던 것이다.

 

빌라흐의 헝가리 도시에 있는 성인의 무덤에는 총독이 이런 메시지를 새기게 했다.

"이곳은 카페스트라노 출신으로, 온갖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 요한의 무덤이다.그는 신앙의 선구자이며 옹호자이고 교회의 파수꾼이며, 자기 수도회의 열성적인 보호자이다.또한 그는 온 세계의 장식이며 진리와 정의의 애호가이고 생활의 모범으로 가장 확실한 교리의 인도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말로 찬양받을 그 분은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낙관주의자에게 적합한 비문이다.

 

옥좌에 앉으신 성모님과 성프란치스코

(아시시 대성당 하층 제대 벽화-치마부에 그림)

 

가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의 「성직자들의 거울」에서

(Pars I, Venetiae 1580,2)Z

 

덕망 있는 성직자의 생활은 빛과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식탁에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칭송받을 만한 윤리 생활의 모범으로 환히 빛나야 하고 온갖 악행의 더러움과 불결을 떨어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처럼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품위 있게 살고 빛나는 사려와 분별력으로 세상의 빛처럼 다른 이들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탁월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과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계자들인 사제와 성직자들에게도 전하신 다음 말씀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름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그러나 악행의 때로 더럽혀져 쇠사슬로 묶인 채 나쁜 표양을 주는 사악한 성직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 흡사 아주 더러운 흙처럼 짓밟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생활로 봐서 멸시받아 마땅한 자는 그의 설교도 멸시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 교회를 잘 지도하는 사제들 특히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사제들은 두 갑절의 영예를 받아 마땅합니다.

거룩한 사제들은 두 갑절의 영예 즉 직무로 인한 영예와 자기 인격에 기초하는 영예, 세상의 영예와 영적인 영예, 그리고 일시적인 영예와 영원한 영예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서, 사라져야 할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의 제약에 예속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영원하신 임금님의 마음에 드는 슬기로운 봉사자가 되기 위해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하늘로부터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이 자기 자신을 비추기 위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 빛 줄기를 주위에 퍼지는것처럼, 의롭고 정직한 성직자들의 빛나는 생활도 자신의 거룩함의 광명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빛과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지도할 의무를 진 사람들은 자기를 통해서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생활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성프란치스코와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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