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0월24일 성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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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0-23 ㅣ No.719

 

축일;10월 24일

성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1807-1870)

A.M.Claret.창설자. 스페인

 

쿠바의 ’영적 아버지’인 그는 선교사,수도원 창설자,사회 개혁가,여왕의 지도 신부,저술가 겸 출판 업자,주교이자 피난민이었다.

 

그는 1807년 스페인 살렌트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일 때문에 카나리아 군도,쿠바,마드리드, 파리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여러 곳을 다녔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섬유 공장에서 직조 기사와 디자이너로 일하는 여가 시간에

라틴어와 인쇄술을 공부하였으며,

그것은 그가 후에 사제이자 출판 업자가 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1835년, 28세에 서품을 받은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카르투시안회(게시판 690번참조)와 예수회에서 입회를 허락하지 않아 수도생활을 할 길이 막혔지만 스페인의 가장 대중적인 설교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성체 성사와 원죄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게시판666번,681번참조)

을 강조하면서,10년 동안을 대중 선교와 피정을 하면서 보냈다.

그의 손에서 단 한 번도 묵주가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1849년, 42세에 5명의 젊은사제들과 함께 오늘날 클라렛 수도회(Claretian Fathers) 라고 알려진 선교사들의 수도 단체를 창설했다.

 

같은 해에 이사벨라 2세 여왕의 요청에 따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쿠바의 산티아고 대교구로 향하도록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거의 쉴 틈도 없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고해 성사를 주면서 개혁을 시작했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주로 그들의 축첩생활을 반대하고 흑인 노예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청부 살인업자(안토니오는 그를 감옥에서 석방하도록 했다)가 그의 얼굴과 손목을 난도질했으나 안토니오는 그의 사형 선고를 징역형으로 감면하게 하였다.

 

쿠바인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대책으로 그는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 여러 가지 음식물을 생산함으로써 가족들의 직접적인 필요를 충당하고 시장에도 내다 팔도록 했다.

이러한 행동은 단 하나의 환전 작물인 사탕수수만을 재배하기 바라는 이윤 추구의 투자가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었다.쿠바는 원래 부유한 나라였으나 열강들의 잦은 침입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해 국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그는 침입자들과 맞서 용감하게 투쟁하였습니다.그러자 힘과 돈을 갖춘 열강들은 그를 15번씩이나 탄압한 끝에 감옥에 감금하였고 그후 그를 국외로 추방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쓴 모든 종교 서적에 덧붙여서 그가 쿠바에서 저술한 두 권의 책 제목을 언급하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농업연구’와 ’시골의 기쁨’이다.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여왕의 지도 신부가 되기 위해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 일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워 그 일을 받아들였다.

그 조건은 궁전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과 여왕의 고백을 듣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뿐이며 궁전의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1868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그는 여왕의 추종자들과 함께 파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스페인 이민인들에게 설교했다.

 

안토니오는 평생 동안 가톨릭 신문에 높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스페인에 대규모 가톨릭 출판 기업인 종교 서적 출판사를 세웠고, 200권의 책과 팜플렛을 발행하고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에스코리 앞에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자연 과학 박물관, 음악 및 언어교육원 역할을 하였고, 바르셀로나에는 수도자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는 교리의 절대성을 충실하게 옹호했으며 동료 주교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볼티모어의 기본스 추기경은 그를 가리키며 "진정한 성인이 저기 간다"고 하였다.

그는 63세에 스페인 국경근처(프랑스의 퐁프루아드)에서 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50년에 시성되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당신의 대리자가 되는 사람들은 당신이 당한 것과 같은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언했다. 안토니오는 그의 생애 중 14차례에 걸쳐서 ’클라렛’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천대와 불행의 대명사가 될 만큼 가장 추악한 중상 모략을 받으며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자기의 희생 제물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박해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변덕이나, 무모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신앙 때문에 고통당한다는 것을 확신하면 그것이 전부이다.

 

한번은 이사벨라 2세 여왕이 자기 지도 신부인 안토니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분명하게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그러고는,"모든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 와서 호의를 구하는데 당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그는 "예, 있습니다. 저를 이 직책에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은 더 이상 아무런 제안도하지 않았다.

성 안또니오 마리아 글라렛 주교의 글에서

(L’Egoismo vinto, Romae 1869,60)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불타 올라 온 세상을 두루 다녔습니다. 사도적 선교사들도 같은 불로 타올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북극에서 남극까지, 세상 한 끝에서 그 극변에까지 이르렀고 또 이르고 있으며, 장차 이를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합니다.”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응당히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요하여 힘차게 달리게 하며 거룩한 열성의 날개로 날아가도록 고무시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큰 열성을 가진 사람은 더욱 높은 사랑으로, 더욱 높은 사랑의 단계에 따라 사랑하며, 그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열성으로 강요됩니다.

 

어떤 이에게 열성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안에 사랑의 불이 커져 버렸다는 확실한 표시가 됩니다. 한편 열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의 사랑에 한계가 없는 만큼 가능한 온갖 수단을 써서 하느님이 현세와 후세에서 언제나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며 섬김 받으시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 록 힘씁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합니다. 모든 이들이 현세에서 기쁘게 살고 후세에서 행복하고도 복되게 살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고 아무도 영벌을 받지 않으며, 아무도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며, 잠시나마 아무도 죄악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도들에게서나 사도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자주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의 자녀는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고 가는 곳마다 열기를 주는 사람이며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의 불로 타오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있는 수단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핍은 그에게 기쁨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그것에 달려듭니다. 중상 모략을 기꺼하고 고통의 시련 가운데 즐거워 합니다. 그는 일하고 고통당하면서도 항상 하느님의 가장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만을 찾는 데에 있어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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