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동성당 게시판

뿌리가 나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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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선정 [tina.sj] 쪽지 캡슐

2000-04-28 ㅣ No.1880

뿌리가 나무에게

 

                     -- 이현주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들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을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 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이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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