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가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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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희 [adrong] 쪽지 캡슐

1999-10-06 ㅣ No.809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너무나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키아누  리브스나, 브래드 피트 이상의 매력을 듬북 지녔던 그 선생님은 단발머리 여고생들의 가슴에  백마 탄 기사로 자리잡기에 충분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영어 선생님에게 잘 보일까를 연구하며, 밤을 새워,

영어 문장을 암기하고, 단어를 외웠었다. 덕분에 고교시절 나의 영어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엔 우리는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곤 했는데....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고, 몇년이 흐른 후,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 선생님은 더 이상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백마 탄 기사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남자인 것을...........

아!!! 그 때의 실망감, 좌절감, 마음 속에 고이 간직했던 보석을 잃었을 때같이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실체가 아닌, 신기루 같은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는 오랜 추억 속의 인물이 된 그 선생님이 즐겨 외우던 릴케의 시가 생각난다.

 

         가을 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 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십시오.

  그들을 재촉하여 원숙케 하시고

  마지막 남은 단맛이 포도송이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자는, 이제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오래 고독할 것이며,

  밤을 밝혀 책을 읽으며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안에 잠기면 가로수 사이를 헤맬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릴 적에.

 

                                        ( 릴  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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