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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느님이 의심스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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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121.131.235.*]

2011-04-27 ㅣ No.9464

† 찬미예수님.
 
하느님이 의심스러울 때 주님께서는 진정 저를 사랑하시는 분, 저의 생명을 영원케 하시는 분이 맞는지 묻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저의 삶을 얼마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 놓으셨는지 묻거나 때로는 온갖 의심속에서 해매고 있어 믿음의 울타리 밖에서 쓸쓸히 떠도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저를 뜨거운 빛으로 아프게 깨워주시길 청하며 하느님 빛속으로 아득히 밀어넣어 달라고 때 쓰기도 합니다. 그 옛날, 저를 싱그럽게 하는 용서의 바람, 저를 따듯하게 하는 화해의 햇살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달라고 청하지요.
 
밑에서는 결코 볼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하시고, 아래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을 깨닫게 해 달라고 눈물 글썽이며 간곡히 청해야 할 때면 지금껏 지어보지 못한 새 미소를 드러내게 해달라며 기도를 맺기도 합니다.
 
모든 이가 저마다 주어진 성소를 향하며 제가 하느님의 궁전 속으로 들어가 사랑과 생명이 깃든 평화를 간절히 기도하며 처음 세례를 받을 때의 뜨거운 감격을 되살리게 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신 하느님 안에서 다시금 부활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기쁨과 감사함의 눈물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 "주님은 진정 창조주시요.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의심없이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으로 봉헌하는 삶.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작가 김영수님의 '기도가 그리운 날에는'이라는 詩集(생활성서사)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살며 때때로 수 많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의심과 그 아픔에 휩쌓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에는 글자나 인간적인 학문으로만 읽지 말라는 격언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어렵고 쓰디 쓴 고독이 함께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비 크리스천이나 악인들조차 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역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모르게 지나가면서 생활속의 고통이 많을 수록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는 갈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어느날은 '믿음' 하나조차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도록 내 자아와 범벅 되어 내 발걸음이 돌 덩이를 단듯 무겁기도 무기력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은 절대적 사랑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믿는다는 것, 쌍날칼의 하느님이라는 것, 구약을 통하여 질투의 하느님, 분노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느끼거나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 안에 산재할 수 있는 '게으름과 교만과 불안'의 회색 안개를 걷어주시려는 진, 선, 미를 초월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주님 섭리 과정임을 믿으십시오.
 
누구나 희로애락, 춘하추동, 새옹지마등 변화가 일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신앙인은 이 때에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의 주님을 믿을 필요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로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고 신성과 인성이 하나되어 오신 주님께 여쭤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변화와 혼돈은 나약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좋은 일환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은총만을 믿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이 분들은 영이 비교적 맑기에 식별도 수월할 것입니다. 자매님도 또한 나름대로 신중함, 특히 공적인 글을 통하여 자칫 비복음적으로 흐르기 쉬운 그것을 경계하며 고민을 거듭 하셨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식별 가운데 자신의 진로를 좀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또는 혼돈을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들에 의하여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저버리게 만들려는 악의 술책은 또한 무엇들이 숨어있을까요?
 
신부님들도 지상의 여정 가운데 때로는 주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원 앞의 찰나인 지상에서의 악의 갖가지 술책 및 일시적 상처 등에 굴할 수 없기에 이 때의 묵상할 수 있는 것이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자매님의 질문과 발 맞추어 교회의 믿을교리(공적계시)들을 간추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느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것은 (어둠 위의) '빛'이었다.
2. 크리스천은 신약을 믿는다.
3. 약속(신, 구약)은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4. 성서는 비유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 백성을 비유함이다.
    ; 예수님 탄생(크리스마스=그리스도 미사)으로부터 기원이 시작 됨으로서 현재는 기원후(A.D=Anno Domini 그리스도의 해,  [명사] 기원 원년 이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를 원년으로 하여 이른다.)로서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된 2011년간 우리는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함께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며, 예수님도 유다출신인 점을 보며 우리 자신은 과연 박해자의 후손인가, 순교자의 후손인가를 묵상하는 것은 어떨까?
 
5.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묻지않고 다만 용서를 해 주시는 분으로서 내 힘으로는 더 이상 버텨 나가기 어렵다고,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지금 곧 감실 앞으로 가면 된다. 이 때에 성체조배, 영성체를 직접 영하기 어렵다면 신령성체조배, 신령성체를 함께 바칠 수 있다.
 
6. 창조주를 온전히 모시는 성모님은 창조주체이시다(하느님 상속은 남녀 구분이 없다).
7.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로서 인격적인 신앙 선배이시다. 성령의 가장 합당한 짝궁 성모님은 하느님 어머니이시다.
8. 첫번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서 인간의 원죄가 시작 되었으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모님은 두 번째 아담과 하와로서 가톨릭(보편성) 교회는 성모님만의 교회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어머니께서 함께 하시는 신앙 공동체이다.
 
9.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의노 관련 게쎄마니 기도시 '주님의 기도'를 바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영혼의 목마름을 호소하셨다. 
 
글의 양이 많아졌습니다.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구약을 보고 같은 의심을 피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지상에서의 삶 끝까지 왜 하느님을 믿고 닮고 따르고자 할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 명료하다고 보여집니다. 주님도 자매님도 악을 멀리하고 선을 장려하고 기원하는 발로심이 함께 하는 이 때에 다만 지나가는 자리가 아름다운 주인공이자 순례자가 되자는 메시지라 보여집니다.
 
예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아이들에게는 주입식을,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기적의 비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주 천년을 하루같이 사시는 주님 안전에서 어린아이처럼 이해하는 것도 은총으로 여겨두십시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린 아이때는 어린이의 마음이었고 어른이 되어 어른의 마음이 되었습니다를 함께 묵상해 나갑시다.
 
자매님의 구약에 대한 의구심은 매일미사책 내의 '오늘의 묵상'을 보다 가까이 하시면 풀릴듯 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왠지 공부생활을 즐기실 분으로 여겨집니다. 공부생활도 또한 십자가 언덕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와 관련있다고 여겨집니다. 기도생활과 봉사생활과 성사생활과 공동체생활도 함께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은총이자 기회임을 믿으십시오.
 
이 때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전하지요.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곧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큰 기쁨이자 행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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