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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송봉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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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4.10.164.*]

2011-04-28 ㅣ No.9467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하느님 상은

우리가 신앙생활, 영성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건강하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그릇되고 경직된 태도로 대하게 된다.

 

 

우리가 지닌 하느님 상은

우리 개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모든 것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한다.

우리가 무슨 이유로 기도하는가에서부터

고통과 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우리가 어떤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건전치 못한 하느님 상은 건전치 못한 행실을 낳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면서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 상은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기보다 정의로우신 하느님일 경우가 많다.

죄를 지으면 벌을 내리시는 엄격한 정의의 하느님 말이다.

이 말에 "나는 아니야." 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다음 물음에 대답해 보기 바란다.

언젠가 여러분의 자녀가 크게 아팠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여러분은 혹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는가?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길래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혹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하느님이 우리 집안에 이런 벌을 내린다는 말인가?" 등 말이다.

흔히 우리는 꿈자리가 사나우면 불안해하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못된 행위를 꾸짖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다.

'내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또는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라는

생각 그 밑바닥에는 하느님은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는

엄한 심판관이라는 그릇된 이해가 깔려 있다.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갖고 있는 것만큼

우리 영혼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 대표적인 에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 <입다>이다.

<입다>는 하느님은 피를 보아야만 축복을 내려주시는 분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나가면서 기도하기를

하느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돌아오는 길에

제일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늘 그렇듯이 수많은 하인 중 하나가 제일 먼저 마중 나오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 첫번째로 그를 마중나온다.

<입다>의 비극은 그가 갖고 있던 그릇된 하느님 상 때문에 생긴 비극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구약성서를 그릇되게 이해한 까닭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과 벌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한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공의(公義)로우신 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사실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분노하는 하느님을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니 하느님은 인간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화를 내시는 분처럼 다가선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이 그렇다.

신명기 28장에는 매 구절마다 하느님께서 불순종하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치시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은 당신께 불순종한 인간을 악성 종기와 온갖 피부병으로 내려칠 것이요,

미치게 만들고 눈멀게 할 것이요,

원수들 손에 끌려가게 할 것이다.

또 아무리 수고하여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한다 해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서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감히 하느님께 불순종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또 어쩌다 불순종을 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언제 천벌을 내리실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눈이 멀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신명기 28장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머리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밑바닥에서는 분노하는 하느님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느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산다고 해도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또한 하느님이 사랑의 아버지임을 알지 못하기에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용서 체험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게 되면

엄격하게 율법적으로 키울 것이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사랑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의 아버지로서 대하기보다

진노하시는 심판관으로 대하는 두번째 이유는

사목자들의 그릇된 설교 탓이다.

본디 사목자들은 신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도록 도와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옥과 심판에 대해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난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Sinners in the Hand of Angry God)

이란 책이 널리 읽혔었다.

이 설교집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죄인을 붙들어 주고 계시는 것은

마치 시뻘건 용광로 위에서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만약 하느님이 진노하시어 손을 놓으시면

그 죄인은 여지없이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옥과 심판을 주제로 한 설교 속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당연히 무서운 하느님이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와

구약성서에서 얘기하는 심판자 하느님은 서로 다른 분이신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과 동일한 분,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공포감을 느끼겠지만

계속해서 읽다 보면  "제발 내게로 돌아와 다오." 라는 말을 만나게 된다.

구약의 하느님은 인간을 향해 자주 화를 내고 위협하고 고발하지만,

그 까닭은 인간을 응징하고 벌하려는 데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의 위협적인 말씀은 언뜻 보면

죄지은 인간을 당장 내려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용서가 담겨 있는 위협이다.

죄인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은 즉시 그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

 

 

예레미야 1,14-16과 3,12-14를 읽어보자.

1,14-16에는 무시무시한 하느님의 진노와 협박이 쏟아져 나온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쏟아지리라.

내가 북쪽 나라들을 불러모아 이스라엘의 모든 성들을 치리라.

내가 이 백성을 이렇게 심판하리라."

하지만 3,12-14에 가면 하느님의 진짜 마음이 나타난다.

"나를 배반한 이스라엘아, 제발 돌아와 다오.

나는 마음이 모질지 못해 너희에게 무서운 얼굴을 하지 못하겠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가 난 이 마음을 계속 갖고 있지 못하겠구나.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 아니냐?

...나를 배반하고 떠나간 자들아, 제발 돌아와 다오."

 

 

마지막 구절 "제발 돌아와 다오." 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는

당신을 떠나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을

돌아오게 하려는 간절한 바람일 뿐이다.

그것은 다윗에게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윗은 자기 부하의 아내 바쎄바를 취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자는 마땅히 돌로 맞아 죽어야 한다(신명 22,22-24참조).

그렇다고 하느님이 정말로 다윗을 돌로 쳐죽이셨던가?  아니다.

하느님은 다윗을 돌로 쳐죽이면서까지 법 질서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완고한 다윗을 회심으로 이끄신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비유 하나를 들려주신다.

많은 양을 갖고 있던 어떤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 양을 잡는 것이 아까워

이웃집 가난뱅이의 하나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다윗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신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당신 자신에 대한 소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 야훼는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하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출애 34,6-7)

이 구절은 하느님의 열 가지 속성을 언급하고 있다.

자비· 은총· 좀처럼 화를 내지 않음· 사랑이 넘치심· 진실하심· 

수천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심· 잘못을 용서하심· 

반항하는 잘못을 용서하심· 실수하는 죄를 용서하심· 잘못을 꾸짖으심.

 

  

이상 열가지 속성의 맨 마지막 것,

'잘못을 꾸짖으심'에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정말로 진노하시는 하느님이시라면

죄악이 많은 곳에 그분의 진노하심이 내려야 할 테지만

오히려 그분의 은총이 넘치며 "제발 돌아와 다오." 하는 애절한 호소만 들려올 뿐이다.

바오로 사도가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증언했듯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간절하고 애절하다.

호세아서를 보라.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서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 2,21-22)

특히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 다오."란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야 한다.

또  "아!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호세 6,4-6)

다시 한번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 다오." 라는 말이 나온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이 간절한 호소를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어찌 하느님을 멀리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 어찌 상처를 드릴 수 있겠는가.

호세아서 11장을 읽어보자.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느냐.

...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호세 11,8-9)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당신께 불순종하는 인간을 벌하기보다는

당신께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하느님의 마음,

이 마음은 사랑에 상처받은 마음이다.

 

 

하느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하느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면

하느님께서 간절히 듣고 싶어하시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하느님께서 듣고 싶어하시는 이름은

야훼, 엘로힘, 아도나이 같은 비인격적인 칭호가 아니다.

'아빠, 아버지 (Abba ho pater)'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이름이다.

여기서 '아빠(Abba)'는 예수께서 하느님을 부를 때 쓴 아람어이고,

'아버지(pater)'는 우리말 번역이다.

초대교회는 하느님을 부를 때

예수께서 사용했던 아람어 칭호 '아빠'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아람어를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말 '아버지'를 붙인 것이다.(갈라 4,6; 로마 8,15).

교회 전통은 이렇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언젠가부터 아빠란 말은 떨어져 나가고 아버지만 남게 되었다.

어쩌면 다 큰 사람들이 아빠라고 하는 것이 쑥스러워서 그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도저히

하느님을 치시는 하느님, 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셨던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

올바른 신관을 가르칠 자격을 가진 분이시다.

토마 사도가 예수께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또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고 있다." 고 하심으로써

당신만이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하신다.

이러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느님에 대한 바른 상은

"하느님은 아빠 아버지요,

이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라는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신약성서 여기저기에서 하느님이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치시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통상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비유 말씀이 유명하다.

루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 불려지는 비유로서

'하느님은 사랑의 아버지이다.' 라는 메시지를 가장 알차게 담아놓았다.

하느님 아버지의 정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비유 안에 들어 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주는 복음이다.

만일 성서 전체에서 어느 한 장만을 택해 가지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루가복음 15장을 선택하리라!

왜냐하면 15장에 나오는 이 비유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복음의 본질을 잘 알려주기 때문이다.

 

송봉모 신부「대자대비하신 하느님」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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