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잊을 수 없는 사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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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신 [hsw69] 쪽지 캡슐

2000-09-28 ㅣ No.3854

 

  잊을 수 없는 사람

 

 

그해 겨울 안거를 우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아무런 장애 없이 순일하게 안거를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듬해 정월 보름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일. 해제가 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고 우리는 그 해제철을 앞두고 마냥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해제 전날부터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찬물로 목욕한 여독인가 했더니, 열이 오르고 구미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오한이 드는 것이었다. 해제는 되었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산에서 앓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수행자는 성할 때도 늘 혼자지만 앓게 되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의료기관도 없다. 그저 앓을 만큼 앓다가 낫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철저하게 무소유였다. 밤이면 헛소리를 친다는 내 머리맡에서 그는 줄곳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떠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 주느라고 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잠깐 아랫 마을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한낮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도 감감 소식이었다. 쑤어 둔 죽을 저녁까지 먹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밤 열 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헌신적인 정성에 나는 어린애처럼 울고 말았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래야 40여 리 밖에 있는 구례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 수단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이다.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온 것이다.

 

서로가 돈 한 푼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처음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토록 간절한 정성에 낫지 않을 병이 어디 있겠는가. 다리가 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 다음날로 나는 거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거처하던 암자에서 5리 남짓 깊숙이 올라가면 폭포 곁에 토굴을 짓고 참선하는 노스님 한 분이 계셨다. 노스님이 무슨 볼일로 동구 밖에 다녀올라치면 으레 우리들 처소에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노스님이 메고 온 걸망은 노스님보다 먼저 토굴에 가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듯 무슨 일이고 그가 할 만한 일이면 말없이 선뜻 해치웠다.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한 채 각기 운수의 길을 걸었다. 서신 왕래마저 없으니 어디서 지내는지 서로 알 길이 없었다. 운수들 사이는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통했다. 세상에서 보면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서로가 공부하는 데 방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해서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 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얽힘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기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사문들은 어느 모로 보면 비정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단계다. 긍정의 지평에 선 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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