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9월13일 성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축일

인쇄

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09-12 ㅣ No.637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팔레트모의 성니콜라 성당 이코노스타시스의 일부)

 

축일 9월 13일

성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349 ? -407)J.Chrysostomo 407년 시리아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 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주교의 강론에서.(Ante exsilium, nn. 1-3:PG 52,427-430)

 

34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황제군이 장교 아들로 태어났다.

안티오키아에서 외교인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고,

안티오키아 학파이 거두인 타르소의 디오도루스로부터는 신학을 배웠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369년에 멜레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374년경에 성 바실리오의 지도아래 은수자가 되어, 수덕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동굴 속의 엄격한 생활,고행으로 건강을 해친 나머지 돌아왔다가,

386년에 사제로 서품되어,12년 동안 안티오키아에서 성 플라비안 주교를 도왔다.

 

사제가 되어 설교직에 헌신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설교가 너무나 유명하여 크리소스토모,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받았으며, 390년부터는 신약 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8년,그는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콘스탄티노블 총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교회 쇄신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 관습을 개혁하는 데 힘씀으로써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특별 기부금 제도를 마련하였고,

교회의 사치와 남용을 단죄하였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행락과 사회의 사회 부조리에도

단호히 대처한 만큼, 원수들도 많았다.

그는 정직하고 엄격한 자신의 삶을 살므로써 원수들에게 대항하였다.

왕실의 증오와 원수들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해야 했다.

403년, 그를 미워하던 테오피로를 비롯한 36명의 주교들이

오크 시노드에서 29개 조항을 들어 단죄하고, 유배시켰다.

그러나 내란과 지진이 일어나자 황제는 그의 명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404년에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재차 그를 귀양 보냈다.

이때 그는 238통의 편지를 남겼다.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로 정하는데 금구요한의 경우

9월 14일이 십자가 현양 축일인 관계로 그 전날인 9월 13일에 축일을 지낸다*

 

가톨릭 신앙을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인해 "황금의 입" 즉 크리소스토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교회의 희랍계 박사 4분 가운데의 한분으로 공경받는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그는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안티오키아 출신의 위대한 설교가인 요한을 둘러싸고 있는

애매모호함과 흥미 진진함은 대도시에서 살던 위대한 사람의 생애답다.

시리아에서 12년 동안 사제로서 봉사한 다음, 콘스탄티노플로 온 요한은

자신이 제국의 가장 큰 도시의 주교가 됨으로써 황제의 계략에 희생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금욕주의자로 눈에 띄지 않는 품위가 있는 요한은 수도자로서 사막생활을

하는 동안 얻은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제국 정치하에서 주교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의 신체는 약했지만, 그의 혀는 강했다.

그의 설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설교의 요점은 고관들과 권력자들을 괴롭혔다.

어떤 설교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궁정에서 그의 생활 양식은 몇몇 대신들만이 알아챘다.

그는 황실과 교회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는 교구청 관리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제공했다. 요한은 고위 관리들 앞에서 그에게 상석을 내어놓는

궁정 의례를 비판했다. 그는 매수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열성이 그를 결정적인 행동으로 이끌었으니 승진을 위해 뇌물을

쓴 주교들은 면직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가난한 이들과 재산을

나누어 쓰는 구체적 단계를 제시했다.

 

기혼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들만큼 부부간에 성실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아담 때문에 사유 재산이 존재했다는 요한의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요한은 정의와 애덕이 실현될 때, 이 두 가지 가치 기준이

하나로 결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연하고 정력적이고 솔직한 요한이 특히 설교대에서 흥분할 때에는

개인 문제에도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는 좋은 포도주와 훌륭한 음식을 몰래 실컷 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부유한 과부인 올림피아의 성실한 영적 지도자였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 은

그가 부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위선자라고 험담을 했다.

소아시아에 있는 무능한 주교들을 반대한 그의 행동은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탐욕적이고 교회법에서 부여한 권위를 크게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을 개인적으로 공공연하게 비난하던 두 명의 유력한 인물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로와 에우독시아 황후였다.

테오필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요한에게 이단을 추종하고 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테오필로와 분노한 다른 주교들은 에우독시아의 지원을 청했고 황후는

황실 궁정 생활의 사치를 복음적 가치와 대조시키는 그의 설교에

분개하고 있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악한 이세벨과 간악한 헤로디아에 대한

설교들은 황후와 관련되었고, 황후는 마침내 요한을 추방시켰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씀과 실례를 들어 설교함으로써 불안한 자를

편안하게 하고 안락한 자를 불안하게 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예시한다.

그의 정직함과 용기 때문에 그는 주교로서 어려운 직무수행,개인적인

험담,추방 등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주교들은 물질 재화의 소유, 경제 성장과 정당한 분배,평화와 전쟁,

모든 민족의 형제적 공존 등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12항)

 

Saint Jean Chrysostomo, Saint Basile le Grand

 

 

*황후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직설적인

 비방에 대해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해 동로마 황제의 법정이 개정되었을 때

 다음의 가능성들이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1.그를 감옥에 넣는다.

  그러자 그들은 말햇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할 기회를 갖고

  그가 항상 바랐던 대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2.그를 추방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3.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러면 그는 순교자가 될 것이고

  주님께 가려는 그의 열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즉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처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는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4.죄를 짓게 한다.

  "세상에는 그가 대단히 두려워하고 온몸으로

  미워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죄가 그것이다.

  그러니 그가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이 오직 죄뿐이라면

  여러분의 힘은 비할 데 없이 클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

             구엔 반 투안 주교님 글 중에서

 

 

 

♬Canto Gregoriano-Gloria XV.(베네딕도수도원)



24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