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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5일 성녀 루이제 축일♬Credo(빈소년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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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3-13 ㅣ No.1043

 

축일 : 3월 15일

성녀 루이제(루도비까,루이사)

St. Louise de Marillac수절,프랑스,1591-1660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녀.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창설자.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은 1591년 8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정치가들을 탄생시킨 귀족 드 마리약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어느 시대에서든 가난한 자, 병자와 기타 구제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자선 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인류의 복리에 공헌 하는 모든 사업 중에서 제일 숭고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정배인 교회가 그의 거룩한 창립자로부터 계승받은 유물인 것이다. 이 박애(博愛)의 활동은 처음 몇 세기 동안은 개인 개인이 많이 해 왔으나, 그 뒤 차차 이 방면의 활동을 목표로 하는 신심회가 생겨 나중에는 그러한 수도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에는 성 빈첸시오 드 폴이 박애의 자매회라는 병자 간호의 대규모적인 한 회를 창설했다. 그의 협력자로서 큰 공헌을 한 이는 1934년 3월 11일 비오 1세 교황에게 시성된 마릴락의 성녀 루도비카이다.

 

루도비카는 어렸을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후처를 얻었으나, 루도비카에게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건전한 교육을 받게 했다. 포와씨의 수녀들의 도움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카프친 수녀가 되려고 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하였다.

 

루도비카가 가장 원한 것은 자기 일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었으나, 아버지의 희망을 따르는 의미로 22세 때안토니오 러 그라 백작에게 출가하여 그 뒤 12년 동안 아내로서의 충실한 책임을 완수하고 특별히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독했을 때는 성심성의로 간호해 주었다. 그런데 그의 간절한 간호에도 무색하게 백작이 죽게되자 루도비카는 곧 교회에 가서 고해 성사와 영성체를 한 후 여생을 빈민 구호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1623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성령 강림절 미사에서 루이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했다. 그날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야심과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또한 그녀에게 성 프란치스꼬 드 살(Francis De Sales축일:1월24일)로부터 영적지도를 받는 계기가 생기면서부터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던 성 빈첸시오 데 바오로(V.De.Paul축일:9월27일)를 찾았다. 그 당시에 그 성인은 "애덕 형제회"를 조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 전국을 순회하며 강론을 하고 잇던 빈첸시오 드 폴은 여행중 여러 가지 비참한 것을 목격한 뒤 여러 도시와 농촌에 그 교구의 신부의 허가를 얻어 자선 사업의 회를 설립한 수 그러한 회를 순찰, 보호하는데는 루도비카가 가장 적합한 부인이라 인정하고 이를 그녀에게 맡겼다.

 

이렇게 되자 처녀로서 루도비카와 함께 이랗고 싶어하는 사람이 증가했으므로 자연히 한 수도원이 이루어져 이를 ’사랑의 동정녀회’ (Societas Puellarum a Caritate) 라고 이름하고 파리의 대주교의 인가를 얻었다. 루도비카는 회원인 동정녀들이 자애 깊은 어머니였다. 그것은 빈첸시오 드 폴이 그들의 영신상의 지도자였고 아버지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빈첸시오는 매일 그들에게 버린 애를 주워서 데리고 온 때도 있었고, 가난한 자, 병자를 부탁하는 때도 있었다.

 

그들의 수도원은 병원이요, 성당은 교구 성당이며, 봉쇄 구역은 길거리가 되었다. 회칙 초안도 그녀가 작성하였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관대한 사랑은 이 수녀회의 급속한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창설한 성 빈센시오 아 바오로는 여자 수도회로서 오늘날 전세계에 알려진 수도회이다.

 

그녀의 임종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그녀는 1934년에 시성되셨으며,1960. 2.10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녀로 선포 되었다

 

루도비카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60년 3월 15일 이었고 그녀의 나이 69세 였다.이 회는 지금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라 불린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http://www.vincent.or.kr

성 빈센트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http://www.dcsvp.org

 

 

성 빈체시오 아 바울로.(1581-1660)

축일:9월27일.게시판666번참조

 

 

’애덕부인회(1617)’,’선교회 (라자리시트회.1625)’,’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963)’을 설립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주인" 이라며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하게 컸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내적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피에르 베륄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약하기에 이른다. 1617년 빈첸시오는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부인회’를 만들었다. 40세가 됐을 때는 노예들을 찾아가 돌봤으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1625년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받아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의 회’라고도 알려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를 청설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 그녀는 빈첸시오가 일하고 있던 ’착한 어린이들의 학교’근처에서 살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루이즈는 빈첸시오와 만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이 가져온 내면적 어둠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가 빈첸시오 모르게 받아적었던 훈화는 빈첸시오가 수녀들에게 직접 썼던 방대한 양의 편지와 함께 그의 영성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폐쇄적인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셋방이 수녀들의 독방이다. 성당은 본당 성당을 사용하고,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며,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빈첸시오에게 기도는 필수적이었고 그는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세속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은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보다 죄지을 기회를 더 많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또 수녀들이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자매가 어디에 있든간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이 불렀을 때 즉각적으로 순명한 옛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가는 모습은 마치 불이 났을 때 달려 가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 자기의 가장 소중한 물건에 불이 붙어 사랑스런 가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취할 행동,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녀 카타리나 라보레 Catherine Laboure.

축일:11월28일.게시판775번참조

 

성녀 카타리나 라보레는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회에 입회하여 수련수녀로 있던 첫 달 동안, 그녀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발현을 여러 차례 뵙는 은혜를 입게 되는데, 성모님께서는 성녀에게 기적의 메달이 만들어지도록 하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러한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하여 철저한 침묵을 지켰으며,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그 사실을 그녀의 고백신부님에게만 말했습니다.

 

46년 동안 성녀 카타리나는 그 메달을 통하여 일어난 불가사의와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성모님 발현의 비밀을 신중하게 지키면서 평범한 소임을 겸손하게 수행하였고, 특히 파리 교외의 Enghien에 수용된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1876년 12월 31일, 성녀 카타리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티없으신 여왕을 직접 뵈옵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녀의 시신은 57년이 지난 후에 발굴되는데 몸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때 2시간 이상이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무릎에 자기 손을 얹어 놓는 특은을 누렸던 이 성녀에게 죽음조차도 경의를 표하였던 것입니다.

 

카타리나 수녀가 보여준 삶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위하여 평범한 소임을 잘 해냄으로써 성녀가 되신 분입니다. 이 ’보통사람들의 성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성화의 비결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6월 27일, 교황 비오1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11월 27일을 신비한 ’기적의 메달’ 축일로 정했다

 

 

 

 

♬Credo(빈소년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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