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훈민정음 이야기(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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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michael.kim] 쪽지 캡슐

2000-10-10 ㅣ No.3893

.351. 훈민정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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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이야기

한글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럴까? 세종 25년 1443년, 훈민정음이 발표되자 당시 집현전 최고책임자 부제학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3년뒤 완성된 '해례본' 서문에 정인지는 "전하창제"라 기록하였으며, '훈민정음' 서문에도 "내 이랄 위하야 ... 맹가노니.." 라고 적고있다. 또한 세종실록에 보면 최만리의 반대상소에 대해 세종은 "설총의 이두는 옳다하고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여, 세종자신이 직접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다. 한글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면 집현전 학자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한글창제에 관여한 집현전 학자들은 정인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등 일곱명인데 이들을 '집현전 칠학사'라 한다. 특히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 등 다섯나라의 언어에 능통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한글창제 작업에도 가장 많이 동원되었는데, 그의 문집 '보한제집'에, 한글 28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며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세종은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고 전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집현전 소장학자들은 그 후 몇년동안 한글서적 편찬을 하였을 뿐이었다.

절대권력의 군주였던 세종이 왜 그렇게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해야 했을까? 무엇보다도, 사대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중국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 분명했던 중신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궁내에 불당을 지으려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황희정승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창제때 만큼은 내불당사건때와는 달리 초강경으로 대처하였으니, 반대상소를 올린 학자들을 모두 하옥시키고 한글서적 편찬사업을 강행하였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세종 10년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와 한다. 문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모든 백성들이 글자를 알아 인간의 도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세종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세종은 과연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던 것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남달리 열중하였던 세종은 특히 당대최고의 언어학자였으며 어느 학자도 그를 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언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둘째딸 정의공주 등 직계가족들의 도움으로 한글 스물 여덟자를 만들었다. 정의공주의 시댁 죽산 안씨 족보에는,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변음과 토착은 민간용어 또는 사투리로 추측됨). 성삼문의 저서 '직해동자습' 서문에는 세종과 문종이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자들이 한글창제에 깊숙히 관여하였다는 또다른 좋은 증거이다.

한글과 유사한 문자는 없는가? 일본의 "신대문자" 고조선 글자라는 "신지문자"와 "가림토문자" 등이 그 모양만으로 보면 한글과 유사한 면이 많다. 지금도 일본의 신사에는 신대문자를 적어 놓고 신성시하는 곳이 100여개소가 넘으며, 민간의 부적에는 아직도 이러한 문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오랜 옛날 조상의 신이나 영험한 신령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그들이 살던 시대의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때문이다.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 운해> 에는 -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俗用文字가 있었는데 그 수가 일정치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다 - 고 적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한문외에 민간에서 사용되던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만약 세종당시 이런 민간문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문자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세종이 참고했다는 글자 - 고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오랜 세월동안 미궁속에 잠들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이는 세종이 창호문의 문양을 바라보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기역 니은 이라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따 만든 것인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때문이다 기역은 혓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ㅁ은 입모양을 본떴다. ㄱ,ㄴ,ㅁ,ㅅ,ㅇ 이처럼.. 다섯 개의 기본음은 발음기관의 생김새에서 본따 만들었던 것이다. 그외의 글자들은 매우 간단한 원칙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강해지면 기본자에 획을 더하면 된다. (ㄱㅋ, ㄴㄷㄹ, ㅁㅂㅍ, ㅅㅈㅊ, ㅇㅎ...) 그런데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꼴을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가 되는 것이다. 혓부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인 기역 "ㄱ" - 이는 동서양 흑백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현상인 것이다.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94년 7월호에 문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글은,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 이라는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다. 다른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이다.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자의 사치 -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창제는 극소수 양반층만 누리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 혁명 이었다. (KBS TV 일요스페셜 199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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